항목 ID | GC07401321 |
---|---|
한자 | 順興樵軍廳-樵軍廳城隍祭 |
영어공식명칭 | Sunheung ChoGuncheong(Independent Peasant Organization) and ChoGuncheong Seonghwangje(Religious Service, Folk Religion)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인균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 일대에서 지내는 성황신에 대한 제사.
[개설]
영주시 순흥 일대에서 이루어지는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초군청의 성황제’라는 뜻으로 성황제의 주관자인 초군청을 덧붙인 말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질서가 무너지자 농민의 단결과 권익 보호를 위하여 김교림 참봉이 1900년대에 조직한 순흥초군청의 주관으로 성황신에게 기원하는 제사를 ‘순흥초군청 성황제’라고 한다.
순흥초군청은 서구문화의 도입 등으로 반상의 개념이 무너지면서 사회가 무질서하던 개화기에 사회질서 회복을 위해 결성된 국내 유일의 순수 농민 기구이다. 관 조직에 상응하도록 순흥군수와 동격으로 선출된 좌상 한 명을 추대하여 관과 토호들을 견제하면서 고을 향약에 의한 안녕·질서와 농민 보호를 위한 행사를 한 것이 지금까지 맥을 이어 전해오고 있다.
[근대 농민 자치기구 순흥초군청]
순흥초군청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근대 농민 자치기구로서 양반의 횡포에 대항한 유일한 농민조직이라 할 수 있다. 관에서도 농민의 권리를 인정하여 주었기에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순흥초군청은 농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 결집을 강화해주는 특징을 지녀야 했기에 성황제를 지내고 줄다리기와 같은 민속행사를 진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순흥초군청 설립과 운영에 관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두레골 성황당의 『모연문』이 1905년에 작성되어 그 이전에 조직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은 없으나 이야기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부호였던 김교림이 토호세력의 고약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관에 자치기구 설립을 청원하였고, 관은 이를 받아들여 ‘순흥초군청인’이라는 직인을 만들어줌으로써 설립되었다고 한다. 순흥초군청인이라는 직인은 높은 권위를 가졌기에 좌상으로 임명된 이는 순흥군수와 맞먹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순흥초군청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능과 권한도 점차 축소되었으나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농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토호세력에 맞설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기능과 권한이 축소되긴 하였으나 성황제를 주관하는 기능은 여전히 지속하였기에 현재 영주 순흥초군청 민속문화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관과 민이 어우러진 순흥초군청 성황제]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조선시대 읍치인 순흥에서 1900년 무렵에 김교림 참봉이 조직한 초군청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하는 제사이다. 비봉산에 있는 본당의 성황사에서 제의를 진행한 것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순흥은 1457년(세조 3)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한 금성대군이 역모로 죽임을 당함으로써 순흥도호부가 폐부되고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분속되었다. 순흥도호부의 폐부는 부에서 지내고 있던 비봉산 성황제가 민이 주관하는 성황제로 변화되도록 만들었다. 성황제는 이 시기부터 호장을 중심으로 읍민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전승되게 되었다.
순흥은 1682년(숙종 8) 다시 도호부로 복설되었고, 순흥 율림에 성황단을 새로이 건축하여 관 주도의 성황제를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민 중심의 비봉산 성황제가 관의 율림 성황제와 대치되면서, 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향리들이 비봉산 성황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비봉산 성황제는 민간 주도의 성황제에서 향리 세력과 민이 함께 참여하는 성황제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1900년대 김교림 참봉에 의해 순흥초군청이 결성되면서 율림의 성황제는 폐지되고 비봉산 성황제가 순흥초군청이 주관하는 제의로 변화하였다. 순흥초군청은 초군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두레골에 성황당을 중건하여 새로운 성황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비봉산 성황제와 두레골 산신제로 재편되었으며, 두레골 산신제가 상당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30년 무렵 금성대군의 피가 묻었다는 혈석을 옮기는 일이 생겨나게 되는데, 순흥초군청에서 주도하여 혈석을 옮기게 되었다. 순흥초군청은 혈석을 두레골 산신각 옆으로 이안하면서 비봉산 성황제인 본당제와 두레골 산신각과 금성대군당을 중심으로 한 상당제로 재편되었다. 혈석으로 인해 두레골 산신제보다 금성대군당을 우선시하게 되어 성황제의 중심 제의는 금성대군당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절차]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영주시 순흥면에서 순흥초군청이 주관하여 성황신에게 지내는 제사로서 크게 상당제와 본당제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상당제는 순흥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5㎞ 떨어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 위치한 두여(斗餘)에서 거행된다. 두곡(斗谷)이라고도 불렸던 두여는 오늘날 ‘두레골’이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4~5호가 거주하는 작은 산골마을인 두여동의 입구에 상당이 있다. 상당에는 당이 두 채가 존재하는데, 금성대군을 모시는 금성대군당과 산신각이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본당제는 음력 1월 13일 오전 순흥 비봉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순흥 본당에서 거행된다.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제관의 선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음력 정월 초사흗날 제관이 선정되는데, 제관은 순흥초군청 성원들 중 선정되며, 가족을 포함하여 깨끗한 성원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금기를 하게 되는데, 총 10일간 금기 기간을 가지게 된다. 제관은 부정하다고 인지되는 모든 것들과 단절하고, 육식을 금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집에 금줄을 침으로써 부정한 것을 막는다.
제의에 사용되는 희생물인 소를 ‘양반’이라고 호칭하며 영주장에서 구매를 한다. 그리고 양반의 앞에서 절과 함께 제의를 하게 된다. 제의는 금기와 함께 행해지는데, 하루 두 번의 목욕재계와 ‘양반’을 향해 배례하는 것이다. 정월 열사흗날 아침 8시경이 되면 제관들은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본당주인, 상당주인, 좌상, 고문의 순으로 본당에 들어간다. 본당주인은 본당에 도착하여 제당 청소를 하고 ‘부정풀이’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복을 점치거나 한 해의 복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제당 청소와 부정풀이가 끝나면, 폐백을 드리고 기제사의 순서와 같이 제의를 지낸다. 본당제를 마친 제관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금줄을 걷고 음복 행사를 진행한다.
상당제는 정월 열사흗날 저녁에 지내는데, 희생물인 ‘양반’을 안내하여 상당으로 향한다. 제관은 본당제와 마찬가지로 상당주인이 부정풀이를 하고 폐백을 드린다. 그리고는 밥을 짓고 양반을 살해하는 희생 제의를 한다. 희생물의 각 부위를 제당에 올리고 지은 밥을 상당에 올리는 것으로 제의를 시작한다. 기제사의 순서와 같이 진행되며, 철상 후 제당을 떠난다. 제관들은 상도가로 돌아와 금줄을 벗기고 음복을 진행하며, 성황제에 진행된 예산과 관련하여 결산보고를 진행하며 제의를 마무리 짓는다.
[축제화된 제의]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현재 두레골 성황제와 더불어 민속축제로서 행해지고 있다. 순흥초군청 민속문화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두레골 성황제와 더불어 관청세시풍속행사, 정월대보름 관청풍년기원의례, 정월대보름 고을액풀이, 사물공연과 지신밟기, 성하성북 줄다리기, 초군농악민속놀이, 윷놀이, 투호대회, 널뛰기,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을 행하고 있다.
순흥초군청 성황제의 프로그램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군청 재판놀이는 순흥도호부 토호세력가들이 민초들을 괴롭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초군청 좌상이 직접 행패를 부리는 머슴과 세력가에게 태형과 벌금형을 내리는 놀이이다. 대체로 머슴에게는 태형을, 세력가들에게는 관리 미숙으로 인한 죄로 벌금형을 내렸다.
두레골 성황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신앙이라 할 수 있다. 기원하는 대상은 성황신이며, 정월 열사흗날 오전 진시에 지내는 본당제와 보름 자시에 지내는 대동제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제는 비봉산 진호신에 제를 지내며, 대동제는 금성대군을 기리며 제를 올린다.
성하성북줄다리기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된 놀이로서,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되면서 사라졌다가 복설되면서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다. 순흥도호부의 읍성을 기준으로 위는 성북, 아래로는 성하로 편을 정하여 진행하였으며, 암줄이 이겨야 풍요가 온다고 믿었기에 대체로 숫줄 쪽에서 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군청 농악은 두레 농악으로 불리며, 영주 지역의 위치상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세 지역의 가락이 어우러진 특징을 지닌다.
[역사가 서린 성황제]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주체가 지내왔으며, 자신들의 바람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순흥도호부에서 지내던 성황제는 관의 권위와 바람을 표출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활용되던 하나의 제의 행사였다. 그러나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부가 폐쇄되자 민에 의해 성황제가 유지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가장 큰 연유는 관에 의해 주도되던 성황제가 단순히 관의 권위와 목적을 위해 활용된 것이 아닌 마을의 안녕과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민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니면 성황제라는 제의가 영험하거나 지내지 않는다면 큰 화가 닥친다는 연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히 관에서 민으로 성황제를 지내는 주체가 변화한 것이 아닌 주체의 변화에 따라 당과 제의에 생긴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의 행사였던 성황제가 순흥도호부의 복설로 관의 성황제가 부활한 후 향리가 민의 성황제에 참여함으로써 관과 대립하였다는 점 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견주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00년대 들어 관과 토착세력에 대응할 수 있는 농민 자치기구인 순흥초군청이 생겨남에 따라 권위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성황제를 택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성황제의 기능이 단순히 마을의 안녕에 있는 것이 아닌 제의 주체의 권위를 표출할 수 있는 도구로써 활용되고 있는 것은 순흥초군청 성황제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주체의 변화와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성황제의 제의는 변화하였고 변화 양상은 역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록물이 되었다. 이러한 성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순흥초군청의 목표와 민속을 유지하고 영주의 특색을 드러내기 위한 자치단체의 목적이 일치하여 하나의 축제로서 변화한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변화하는 성황제]
1. 비봉산 성황제
비봉산 성황제는 본당제라고 불리며, 관인 순흥부에 의해 제의가 행해진 관 주도 성황제였다. 그러나 순흥도호부가 폐쇄된 이후 민간에서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제의를 지속해서 지내왔기에 민간 주도 성황제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순흥도호부가 복설 된 이후 비봉산 성황제는 순흥부에 의해 새로이 생겨난 율림의 성황단과 대치되는 향리와 민간이 함께 제의를 하는 관민 합치의 제의 행사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비봉산 성황제는 순흥부의 변화에 따라 성격이 변화하였고, 오랜 기간 다양한 계층 및 세력에 의하여 지속돼 왔다.
비봉산 성황제는 순흥초군청이 조직됨에 따라 순흥초군청이 주도하는 제의로 바뀌게 되는데, 관에 의해 주도되던 비봉산 성황제가 순흥초군청으로 이양된 것은 관이 가지고 있던 권위 및 위상이 순흥초군청으로 넘어간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순흥초군청에 의해 주도된 비봉산 성황제는 순흥초군청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제의로서 성격이 변화하게 되었다.
2. 두레골 성황제
두레골 성황제는 본래 두레골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에 의해 제의가 행해진 두곡이라는 마을의 성황제였다. 하지만 1905년 두레골에 주민들이 거주하지 않게 됨으로써 성황당이 관리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두레골 성황제를 순흥초군청에서는 주목하게 되었는데, 성황당이 있던 장소가 왕실, 토호, 사찰 등에 의해 점유되지 않은 공유지의 교통로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교통로에 성황당이 존재하였기에 초군들은 벌목하기 위하여 산을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산의 위험을 방지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순흥초군청이 두레골 성황제를 주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레골 성황제는 처음에는 초군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의를 하였지만, 점차 자신들의 권위를 알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성황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순흥초군청 성황제는 읍민의 안녕과 풍요를 위하여 시작된 제의적 전통을 계승하여 지역 고유의 전통문화 위상을 고취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초군청을 중심으로 한 조직력의 강화, 심리적 안정 등 내·외적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순흥, 나아가 영주를 터전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경상북도 영주 사람들에게 지역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