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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845
한자 李湛
영어음역 Lee Dam
이칭/별칭 중구,정존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필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10년(중종 5)연표보기
몰년 1575년(선조 8)연표보기
본관 용인
대표관직 대사성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재(靜存齋). 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된 이종유(李宗蕤)이며, 어머니는 영월엄씨(寧越嚴氏)이다. 부인은 경세인(慶世仁)의 딸이다.

[활동사항]

12세 때 부친을 여읜 후 학문에 힘써, 동리 가까이 살던 학덕이 높은 유우(柳藕)의 문하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장인 경세인에게 사사하며 식견을 넓혀 나갔다. 이후 천문, 산술, 의약, 복서, 활쏘기, 말타기, 그리고 그림과 글씨까지 익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였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수찬·지평 등을 역임하고 1545년(명종 즉위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이때 중국의 학자들은 이담의 문재와 품위 있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담은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비록 대신들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비행을 낱낱이 상소하여 논박하고는 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재상이었던 이기(李芑)의 비행을 일일이 들추어 조정에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담이 중국에 다녀온 후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관직을 삭탈 당하였던 것은 바로 지난날 자신의 비행을 논박한 것에 대한 이기의 보복조치였던 것이다.

이기이담이 을사사화 때 관직만 삭탈당하고 유배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1547년(명종 2) 일어난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이담을 연루시켜 경상남도 양산(梁山)으로 귀양 보내었다. 당시 이담이기의 행동에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은 채, 홀로 계신 노모에게 걱정을 끼쳐드릴 것만을 염려하여 평상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귀양길에 올랐다.

출발한 지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자 이담을 이끌고 가던 의금부 병졸들도 그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한다. 귀양지인 양산에 이르러서도 이담은 외부의 일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학문만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학덕을 익히 알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다. 1552년(명종 7) 이기 일파가 조정에서 축출된 후, 신원(伸寃)되었다.

1565년 18년 만에 비로소 옛 관직을 되찾은 이담은 이듬해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거쳐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선조 즉위와 함께 홍문관 부응교로 천거되었다. 홍문관원으로 있으면서 이담은 수시로 임금에게 나아가 유학으로써 선정을 베풀 것을 아뢰며, 연산군중종 그리고 명종 조에 걸쳐 일어난 사화로 말미암아 침체된 학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 같은 일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조광조(趙光祖)에게 시호를 내려 학사들로 하여금 임금을 스스로 신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담의 말을 들은 선조조광조에게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고 이전보다 학사들을 더욱 예우하였다. 그 후 이담은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편찬 사업이 끝난 해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황(李滉)[1501~1570]은 조정에 들어와 일하고 있으면서도 선조의 관심 밖에 있었다. 평소 이황의 학덕을 잘 알고 있던 이담은 “이황의 어짊과 학문이야말로 훗날 한 세대의 귀감이 될 것”이라고 조정에 아뢰어 그를 중요 관직에 써 줄 것을 간청하였다. 승지를 거쳐 대사성·대사간·병조참의 등 주요 관직을 지내면서도 여러 학사들이 일부 대신들에 의해 화를 당하게 될 때 마다 직접 나서서 구해 주곤 하였다.

이담이 대사성으로 있을 때, 오건(吳健)이라는 사인(舍人)이 사소한 실수로 대신들의 노여움을 사 탄핵의 대상에까지 올랐다. 이때 이담은 앞에 나서 “어찌 작은 일로써 그같이 엄하게 다스릴 수 있는가” 하며 극구 반대하여 오건을 구제해 주었다. 1575년(선조 7) 병조참의로 있으면서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던 이담은 동년 12월 신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6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담의 부음을 들은 선조는 재상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보내어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였으며 장례의 모든 절차에 따른 비용을 돕도록 명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사석리 352-2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22 활동사항 수정 2012년 증보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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