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D03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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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웅규 |
“그때 집안이 좀 살 만한 사람들은 집안에 우물이 있었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공동우물을 많이 먹었지.”
옛날에는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그 흔한 물도 상당히 먹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충분하게 물을 먹고 쓰기 위해서는 우물이 필요했지만 우물을 파고 유지하는데 상당한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모두 우물을 보유하기가 어려웠다. 일부 돈 많은 부자 집에서만 우울을 파고 사용하였고 돈이 없는 일반 서민들은 공동 우물을 파서 공동으로 사용했다.
송내동에도 공동우물이 하나 있었다. 지하수가 흔한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개인 우물이 있었지만 대개는 돈을 조금씩 추렴하여 우물을 팠다. 공동우물은 부정을 타면 안 되는 귀한 존재여서 팔 때는 금줄을 치고 정성들여 작업을 했다.
“그때 집안이 좀 살 만한 사람들은 집안에 우물이 있었고, 우리같이 서민들은 공동 우물을 많이 먹었지. 하여튼 우리 집 앞 우물을 제일 많이 먹은 것 같어, 그래가지고 7월7석 날인가 참외하고 부침개 같은 것을 갔다가 놓고 절 한번 하고 그러고 우물 안에 들어가서 바닥을 긁어내거나 이물질을 제거했지. 물을 다 퍼내가지고 바닥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거지. 길옆이다 보니까 동네 애들이 뭔가를 많이 넣고 그러니까.”(박성규, 지역 토박이, 1947년생)
공동우물은 당연히 공동관리가 필요했지만 특정한 사람이 주로 우물을 파고 관리하면서 꾸준히 청결을 유지했다. 우물을 파고 관리하는 것도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성 때문인지 우물에서 떠먹는 한 모금의 물은 오늘날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고 한다. 그 물맛 또한 기가 막혔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물길을 잡아서 우물을 파도 물은 여전히 부족하게 마련이었다. 지하수가 풍부하게 흐르는 곳은 간단하게 우물을 만들었지만 물이 귀한 동네에서는 얕은 물길이라도 잡힐 때까지 토관을 박거나 도르래를 걸쳤다. 송내동 우물은 주로 깊게 파서 두레박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두레박질이라는 것이 도르래를 달아놔도 감질이 날만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시골에서 공동우물의 존재는 마을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알아챌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때로는 은밀한 이야기들도 오고갔다. 한 마을의 대소사가 넘나드는 중요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을의 생활 공동체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우물과 우물터도 도시화, 산업화에 따라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각 가정마다 수도가 직접 들어와서 물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식수원으로서 우물의 기능을 대체했다. 하지만 공동우물의 흔적은 한 마을사람들을 공동체라는 한 울타리 속에 묶는 역할을 했다. 공동우물은 송내동 전체의 소통의 장이자, 공동체임을 확인시켜주는 터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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