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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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谷安里民間人虐殺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주완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8월 11일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의 피란민 희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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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9년 10월 4일 -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 『경남 도민 일보』에 보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5년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0년 6월 30일 - 진실 규명 결정 |
발생|시작 장소 |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
성격 | 학살 사건 |
[정의]
1950년 8월 1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齋室)에 피란해있던 마을 주민 150여 명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86명이 희생된 사건.
[역사적 배경]
곡안리는 경상남도 진주시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을 잇는 2번 국도 상에 자리 잡은 성주 이씨 집성촌으로 전쟁 당시 17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 또한 지금은 2번 국도가 쇠락했으나 당시는 진주-마산 간 가장 주요한 도로 중 하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함락된 7월 31일 이전까지 곡안리에서는 전투도 없었고, 미군이나 국군 혹은 경찰로부터 소개 조치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은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8월 들어 마을 주변에 폭격이 시작되자 불안해진 주민들은 마을에서 뒤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성주 이씨 재실로 피신해 150여 명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재실은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와집이었다. 주민들이 재실로 피신한 후인 8월 4일 쯤 미군이 재실에서 300m거리인 진전 초등학교로 진주했다.
[경과]
마을 주민들이 성주 이씨 재실에서 10여 일을 지내는 동안 인근 마을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지만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만은 안전했다. 한 때 북한 인민군들이 마을까지 내려오기도 했으나 주민들을 해치진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재실의 조상들이 돌봐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자 재실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 미군들이 속속 들어왔고 같은 날 저녁 어스름에 미군 한 명이 통역관을 데리고 재실로 왔다. 이 통역관이 당시 재실의 주민 가운데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이원순 씨[당시 26세]였다는 설도 있다. 미군은 우선 주민들의 정체를 파악한 후 작전 지역이니 떠나라고 하였다. 주민들은 노인과 어린이들이 많고 밤중이라 피란을 가기 어렵다고 하였고 미군들은 다음날 일찍 떠나라고 하고 재실을 떠났다. 주민들은 밤새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고 다음 날인 11일 주민들은 평소 보다 일찍 아침 식사를 한 후 마루에 짐을 쌓아 두고 미군의 통보를 기다렸다.
그 때 재실에서 마을 사지 산자락 대밭 쪽에서 총소리가 났고 미군 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사방에서 재실쪽으로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실탄이 재실 기와에 맞는 소리가 마치 굵은 소나기 오는 것처럼 들렸으며 총격이 가장 심할 때는 귀가 멍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마을 뒤 대밭을 정찰하던 미군들 중 마을에서 2㎞가량 떨어진 산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발대의 공격을 받아 1명이 죽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재실에 있는 사람들이 피난민들이라는 것을 미군이 알고 있었음에도 미군 정찰병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재실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자 재실을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고 주민들은 허겁지겁 양 쪽 방과 부엌, 마루 밑, 변소, 돼지우리 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사격은 계속됐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면서 기총 사격을 해댔다. 박격 포탄이 날아들면서 서쪽 방 지붕이 내려앉는데, 당시 방에 있던 임산부 이귀득[당시 31세]이 온 몸에 피를 흘리며 마당에 기어 나왔지만 아무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한 시간 쯤 사격을 한 뒤 주춤해졌다가 비명이나 아이 울음소리 등이 들리면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황점순[당시 21세]은 아들 이상섭[당시 1세]을 안고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뒷산을 향해 달렸으나 옆에서 함께 뛰던 시어머니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본인도 온 몸 8군데에 총탄과 파편을 맞았다. 그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아들 이상섭과 시할아버지, 시어머니를 이곳에서 잃었다. 이일하[당시 4세]는 고모 조호선이 딸 삼순[당시 2세]과 함께 자신을 안고 재실 관리인의 집인 ‘작은 전각’ 변소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독립 운동가였던 조부모 이교영[당시 72세]와 변담래[당시 74세], 현우순[당시 10세]을 그 자리에서 잃었다. 이렇게 희생된 민간인이 모두 86명이었다.
오후 네 다섯 시 무렵에는 미군이 공격을 멈추고 피난을 가도 좋다고 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닷가 쪽으로 도망을 쳤다. 재실에서 도망간 곡안리 주민들은 일부는 육로를 따라 마산을 거쳐서 진해, 부산 등지로 피난을 갔으며 일부는 고현리 앞바다에서 미군 LST 등 선박 편으로 거제로 피난을 갔다.
재실에서 사망한 이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주민들이 피난을 나갔다가 돌아온 두 달 후에야 수습할 수 있었다. 무더웠던 날씨 때문에 재실 내부에 있던 시신은 뼈와 가죽이 말라붙어 있는 상태였고 밖에 노출되어 있던 시신은 비바람 등에 손상되어 뼈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옷이나 소지품 등으로 신원을 확인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추석이 지나 고향에 돌아와서 재실의 시신들을 수습하는데 마당이며 마루 밑이며 온 사방에 시신이 다 널려 있는데다가 대충 가마니만 덮어놓은 시신도 많아서 무심코 발로 밟고 놀라기도 했다. 게다가 돼지들이 재실 안에서 시신을 물고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임산부 이귀득의 시신은 아기가 자연 분만된 채 새까맣게 되어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결과]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99년 10월 4일 『경남 도민 일보』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경남 도의회와 마산 시의회에서 진상 규명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으며,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의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발족해 곡안리 사건을 조사한 결과 2010년 6월 30일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또한 이 사건 희생자 중 1919년 3·1 운동 당시 마산 삼진 의거를 주도했던 이교영 선생은 200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아 독립 유공자로 추서되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시민 사회 단체, 학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에 대한 특별법은 제정되지 않고 있어 아직도 희생자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배상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