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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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진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착용해 온 의복 및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고대 천안 지역의 복식은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마한과 백제의 복식에 근원하였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으나, 이후 각 시대마다 통일된 복식을 갖추며 변화를 거듭해 왔다. 천안 지역은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은 현대화된 의생활이 일반적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기성복과 양복을 일상복으로 착용하며, 결혼식이나 폐백, 잔칫날 등의 특별한 때에만 전통 한복을 착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복도 과거 집에서 만들어 입던 옷이 아니고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이거나 맞춤복이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결혼식에서도 전통 복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전통 혼례를 치르는 경우나 신식 결혼의 폐백 때에는 전통 복식을 착용한다. 상례 때에 아직 전통 복식을 착용하는 경우도 남아 있다.
[평상복]
천안 지역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만 해도 주로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서울에서 가까워 문화의 발전이 빠른 위치에 있었으나, 보수적인 생활 의식이 강했던 곳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안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양복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945년 8·15 해방 이후이다. 천안시도 서울특별시나 충청남도 지역의 일반적인 복식 흐름에 맞춰 변화해 간다. 1947년 양면과 양말 기계의 국산화로 메리야스 등 직물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6·25 전쟁 이후에는 양장 패션이 본격화되었다.
일부 공직자와 상류 계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했고, 점차 한복과 양복의 이중 복식 생활이 되었다. 그들은 신사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양말에 구두를 신었다. 천안 남자 어른들은 겨울에는 솜저고리, 솜바지, 겹조끼, 솜마고자, 솜두루마기를 입었다. 버선이나 양말을 신고 고무신을 많이 신었으나 구두를 신는 이도 더러 있었다. 머리에 갓을 쓰거나 머릿수건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일반인들 중에는 한복 바지에 양복 상의를 입는 등의 복합적인 차림도 있었는데, 활동의 편리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자 어른들 역시 주로 한복을 입었으며, 겨울에는 상의로 솜저고리, 마고자, 배자, 갓저고리, 치마 등을 입었다. 속옷으로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속치마, 솜바지나 누비바지 등을 여려 겹 껴입었다. 1930년대에 들어온 양복 내의를 신여성들이 입기 시작하면서 속옷이 점차 간소화되고 솜옷이 줄어들었다.
방한복으로는 솜두루마기를 입었다. 저고리로는 깃 따위에 회장을 대지 않고, 깃과 고름을 길감과 같은 색으로 지은 민저고리, 자주고름에 자주끝동이나 남끝동을 달고 자주깃을 단 반회장저고리, 깃, 끝동, 고름 중 한 가지라도 길과 색이 다른 회장저고리 등을 입었다. 그중 민저고리는 대중적으로 입었고, 회장저고리는 명절이나 의식 때 예복이나 예복 받침을 하는 저고리로 입었다. 치마는 띠허리를 단 긴 자락치마가 일반적이었으며 치맛단에 스란을 달거나 금박을 한 예복 치마도 입었다. 사회 활동을 하는 신여성들은 어깨허리를 단 짧은 통치마에 주름을 잡아 흰색저고리와 함께 입었다. 예복 치마는 발이 보이지 않게 입었으나, 일상복으로 입는 치마는 발목에 닿게 입기도 하였고, 통치마는 정강이에 닿게 입었다. 일할 때는 앞치마로 가려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치마가 더렵혀지지 않게 하였다. 기혼자는 쪽진 머리, 미혼자는 길게 땋아내려 댕기를 드렸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 신여성들이 단발머리로 변하였다.
1950년대의 한복은 저고리 길이가 허리까지 길어졌고, 치마는 발목이 보일 정도로 짧아졌다. 주름치마, 맘보바지 등이 유행하였고, 군용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신도 유행하였다. 1957년 나일론이 보급되면서 속옷까지 질기고 가벼운 나일론을 썼다. 남자는 군복이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옷감, 밀수품, 구호품 복지 등으로 옷을 해 입었다.
1960년대는 섬유 산업의 등장으로 양복이 일상복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출로 의류 산업이 급성장하고 기술과 설비의 현대화와 자동화로 제품의 고급화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컬러 TV 보급, 해외 브랜드 도입, 교복 자율화 등으로 캐주얼 브랜드가 급증하며 개성, 여유, 풍요로움을 추구하여 자유로운 스타일의 옷이 발전했다. 1990년대에는 질적 성장이 두드러지고, 개성화와 다양화가 추구되었다.
[의례복]
의례복을 살펴보면, 남자의 혼례복은 자적색 단령포(紫赤色團領袍) 또는 청색 단령포(靑色團領袍)에 흉배를 달아 입고, 각대를 끼고 사모를 썼다. 이는 조선 시대의 부마 또는 관원의 복식을 모방한 것이라서 관복(官服)이라고 하였다. 여성의 혼례복은 초록색 저고리에 다홍치마, 초록색 원삼을 입고 머리를 올려 쪽을 쪘다. 쪽을 찐 비녀에 도투락댕기를 늘이고 앞머리에 족두리를 썼다. 예복은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나, 마을에서 구비하고 있는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예복을 갖추고 있는 마을이 많지 않아서 혼례복을 갖추어 입지 못하고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요즘엔 천안에서도 서양식 혼례 의식이 일반화되어서 신랑은 연미복,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혼례를 치른다.
과거에 여자가 시집을 갈 때는 시댁에서 입을 옷들을 미리 준비하여 치마, 저고리, 행주치마, 적삼, 버선 등을 마련하여 신행 때 가지고 갔다. 부잣집에서 시집가는 사람은 평생 입을 것을 마련해 간다고 하지만, 가난한 집은 한 벌 정도 가지고 가면 다행이라고 했다. 옷을 가져갈 때는 치마와 저고리 등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옷 가운데 열십자 모양으로 실로 떠서 장에 넣었다. 직산읍 군동 1리 구억말, 수신면 해정 1리 엄정말에서는 시어머니나 시할머니가 계시는 경우에는 수를 놓고 장식을 단 주머니를 가지고 가며, 안에 동전 몇 개라도 넣어서 드렸다.
회갑연 때는 잔치를 열고 부모에게 옷을 지어 드렸다. 회갑을 맞는 어른은 바지저고리 위에 도포를 술띠 매어 입고 갓을 쓰고, 부인은 치마, 저고리를 좋은 비단옷감으로 지어 입었다. 자녀들은 남자들은 관복, 여자는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큰 절을 하였다. 옛날에는 회갑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다.
직산읍 군동 1리 구억말, 수신면 해정 1리 엄정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먼저 망자의 속저고리를 마당에서 흔들며 “어이 어이 복~ 복~ 복~” 하고 크게 외치며 초혼을 한다. 속저고리는 지붕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사자상 앞에 가져다 놓기도 한다. 그리고 상여가 나가면 다리 밑에서 태운다. 염습을 하기 전까지는 일반 옷을 입고 있는데 상주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두루마기 한쪽 팔을 빼내고 입는다. 아버지 상에는 오른 쪽 팔을 빼서 입고, 어머니 상에는 왼쪽 팔을 빼서 입는다.
남자 상복은 굵은 삼베로 지은 굴건, 쇠의(衰衣), 요질, 행전, 버선과 짚신을 갖추어 성복일(成服日)부터 졸곡(卒哭)까지 입었다. 여자는 깃광목의 저고리와 치마에 대수장군(大袖長裙)을 입고 삼띠를 맨다. 머리에 수질을 하고 흰 족두리를 쓰고 발에 버선과 짚신을 신는다. 아버지 상에는 옷단을 휘감치고, 어머니 상에는 옷단을 한번 접는다. 상장(喪杖)을 짚을 때 아버지 상에는 대나무를 사용하고, 어머니 상에는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오늘날에도 남자의 상복은 지금과 크게 변화가 없으나 여자 상복은 대수장군이 생략되었다.
요즘에는 장례식장이 크게 번성하면서 상복도 기성복화되는 추세이다. 남자들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광목 등으로 만든 흰색이나 검정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수의는 시신에 입히는 옷으로 미리 만들기도 하고 초상이 난 후에 짓기도 한다. 잘사는 집의 여자들은 자신이 죽을 때 입을 수의를 신행 때 혼수로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수의는 윤달이 드는 해에 만들면 좋다고 한다. 수의의 재료는 삼베다. 삼베는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벌레나 균이 생기는 것을 방지한다. 수의는 장롱 안이나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에 보관했다가 일 년에 한번 정도 꺼내서 통풍을 시킨다.
제복으로는 남자는 흰색 바지, 저고리에 도포를 입고 술띠를 매고 흑립이나 유건을 쓴다. 과거에는 흰색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는 이가 많았으나 지금은 유건을 많이 쓴다. 그리고 양복을 입기 시작한 후에는 제복으로 양복 위에 두루마기만 입거나 혹은 양복에 유건만 쓰기도 했다. 여자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흰색 족두리를 쓰기도 했으나 쓰지 않는 집안이 더 많았고, 기제사 때는 옥색옷을 주로 입었다.
학생들은 학생복을 입었고,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한복저고리와 바지를 입었다. 아이들은 무색으로 옷을 지어 입혔고, 설에는 설빔이라고 하여 색깔 있는 새 옷을 입혔다. 설빔은 천을 직접 물들여 옷을 지었는데 여자아이는 빨간 치마, 노란저고리 혹은 파란 저고리로 입혔고, 10세가 넘은 남자아이는 회색 바지에 파란 저고리를 입히고 고운 색의 조끼를 덧입힌다. 병천면 병천리에서는 이를 설날 입는 고운 옷이라 하여 ‘꼬까옷’이라 하였다. 10세 안쪽의 남자아이의 경우 웃옷 등 뒤에 목단 꽃을 수놓고 허리에 띠를 묶었다. 또 복주머니를 달아주기도 하는데 붉은 색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고추, 버선 등을 헝겊과 솜으로 작게 만들어 매달았다. 주머니 안에는 솜을 채우는데 수신면 해정 1리 엄정말에서는 ‘주머니를 골리면[굶기면] 배를 골린다.’라는 말이 있어서 돈을 조금이라도 넣어서 달아주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배냇저고리를 지어 입힌다. 산달이 가까워지면 임산부나 시어머니 등이 배냇저고리를 만든다. 배냇저고리는 옷깃이 없으며 옷고름 대신에 아이의 장수를 위해 실을 매단다. 배냇저고리는 동생들에게 대물림하는데, 여자아이가 입던 것을 남동생에게 입히지는 않는다. 직산읍 군동 1리 구억말, 수신면 해정 1리 엄정말에서는 첫 아들의 배냇저고리는 시험을 보거나 재판이 있을 때 가져가면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
과거에는 잘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새 옷을 지어 입거나, 혹은 사서 입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형제들끼리는 옷을 물려 입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남의 집에서 받아다 입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남의 옷을 받아 입을 때는 그냥 가져다 입으면 탈이 나기 쉽다. 병천면 봉항 1리에서는 남이 쓰던 옷을 가져올 때는 변소에 두었다가 입음으로서 혹시 생길 수 있는 동토 등을 예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