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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항 2리 삼성·왕대 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041
한자 鳳項二里-山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2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산제당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2리 지도보기
성격 민간 의례|동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 초사흗날 무렵
신당/신체 산제당[제단]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2리에서 매년 정월 초사흗날 무렵에 농사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2리에는 삼성·왕대라는 두 마을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1990년대 초반만 하여도 30여 호의 주민들이 농사를 업으로 생활하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 봉항리 주변이 전원주택 지대로 인기를 끌면서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 2012년 현재 50여 호가 살고 있다. 예전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하나 대부분 떠나고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급속한 변화와 더불어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산제는 최근 중단되었다.

봉항 2리 삼성·왕대 산제는 정초에 길일을 택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나 대개 초사흗날 저녁에 지냈다. 산제의 진행을 위하여 일주일 전쯤 부정이 없고 깨끗한 주민 중에서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보아 제관(祭官)을 뽑았다. 축관(祝官)은 따로 선정하지 않되 마을에서 나이가 지긋하고 한문에 능한 원로가 맡았다.

제관은 산제를 앞두고 엄격한 금기를 지켰다.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산제를 마치는 날까지 부부간에 잠자리도 하지 않았다. 또한 외출을 삼간 채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아야 했다. 마을에서도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특히 산제 당일에는 살생을 하지 않고 주민 전체가 술·담배와 육식을 금했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외지인이 산제를 지내는 날인 줄 모르고 들어왔더라도 산제가 끝난 뒤에야 나갈 수 있었다.

산제의 비용은 마을의 공동 기금에서 충당했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과실, 산적, 메, 흰무리떡, 메, 술 등이다. 술은 집에서 담지 않고 약주를 사서 썼다. 제관이 제물을 준비하는 데에도 까다로운 금기가 적용되었다. 예컨대 제물을 사러 시장을 보러 갈 때는 부정한 것이 눈에 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또한 음식을 조리할 때에는 미리 맛을 보거나 침이 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야 했다.

[연원 및 변천]

봉항 2리 삼성·왕대 산제의 연원이나 유래는 알 수 없다. 단지 예로부터 마을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위하여 산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골이 깊은 산간인 까닭에 산제를 모시는 일이 가장 중요한 큰일이었다.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제를 앞두고 엄격한 금기를 지켰고, 만일 산제에 정성이 부족하거나 부정한 일이 있으면 마을에 우환이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외지에서 들어오는 세대가 크게 늘어나면서 산제에 대한 믿음도 시들해졌고, 급기야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산제도 중단되고 말았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마을 뒷산 밑에 있다. 당집 형태가 아니라 단지 산제를 지내는 터에 제물을 차릴 제단만 갖추어 놓았고 위패나 신위를 따로 모시지도 않았다.

[절차]

산제는 정숙형 유교식 제사이다. 그래서 제관과 축관 외에는 누구도 참석할 수 없었으며 풍물도 울리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제관과 축관은 조용히 산제당에 올라가서 저녁 9~10시 무렵에 제를 지낸다. 그 절차는 제물이 차려지면 제관과 축관이 술을 올리고 재배하며 마을 주민의 소망을 담은 축문을 읽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술을 올리고 재배하고 나서 가가호호 세대주의 소지(燒紙)[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사르는 흰 종이]를 모두 올려 주었다. 산제를 마치면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고 나머지 음식은 집마다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현황]

봉항 2리 삼성·왕대 산제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중단되었다. 게다가 2011년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들이 조림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산제를 지내던 제단을 없애 버려 그 터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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