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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산이 된 세성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193
한자 屍城山-細城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화성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90년 6월 26일 -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에서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6년 10월 5일 -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8년 6월 30일 -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2월 - 『한국 지명 유래집』-충청편에 수록
관련 지명 세성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화성리 지도보기
채록지 신사 1구 경로 회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사리 지도보기
성격 전설|지명 유래담|풍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김복용|이희인|이두황|송가|장가
모티프 유형 시체가 쌓여 바뀐 지명|만인의 생명을 삼킬 사자 형국|시성산이라 흥한 송가와 장가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에 전해 내려오는 세성산의 지명 유래담.

[개설]

세성산(細城山)[219m]의 모양이 사자가 앞발을 딛고 응시하는 모습인 사자 형국이라 전쟁이 나면 세성산에 시체가 쌓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마침내 동학 농민 운동[1894] 때 세성산에서 큰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시체가 산에 쌓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세성산시성산이라고 부르고, 피가 흘러내린 골짜기를 피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성산이 된 세성산」세성산시성산으로 불린 지명 유래담이자 풍수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시성산이 된 세성산」은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에서 1990년 6월 26일 김준철[82세, 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사리]과 이우석[65세, 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신사리]에게 채록하였다. 1996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민병달·이원표 등이 조사하여 1998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민담과 설화』와 국토 해양부 국토 지리 정보원에서 2010년에 발간한 『한국 지명 유래집』-충청편에도 유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세성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나 산 모양이 사자가 앞발을 딛고 앉아 앞을 응시하는 모양의 사자 형국이다. 사자가 사람을 삼킬 형국이라 하여 언젠가는 전쟁이 나서 1만 명의 시체가 쌓일 산이라고 하였다.

갑오년 동학 농민 운동 때 실제로 이두황(李斗璜)[1858~1916]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맞서 동학 접주 김복용(金福用)·이희인(李熙人)[?~1894] 등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이 세성산성에서 대치하였으나 동학군이 패하면서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전한다. 이후 세성산시성산(屍城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피가 흘러내린 골짜기를 피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세성산 인근에는 송가(宋哥)와 장가(張哥)가 사는 마을이 있었는데, 산에 송장이 쌓였다 하여 송가가 먼저 흥하고 장가가 그다음으로 흥한다는 전설도 전하였다.

[모티프 분석]

「시성산이 된 세성산」은 만인의 생명을 집어삼킬 사자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이 동학 농민 운동 때의 세성산 전투로 인해 사실로 실현되었음을 주장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세성산에 동학군의 시체가 쌓여 시성산으로 바뀌었다는 지명 유래담을 통해 성남면 지역이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송장이 쌓인 시성산이라 송가와 장가가 차례로 흥한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지만 세성산 지역의 비극적 사건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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