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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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住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집필자 | 송석기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주택과 집터에서의 삶.
[개설]
군산 지역에서 주생활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주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고택들이다. 조선 후기에 건축된 집들은 남부 지방 주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당시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원도심에 조성되었던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식 목조 주택이 지어졌는데,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도심의 일본인 주거지와는 대조적으로 토막집으로 상징되는 한국인 도시 빈민 주거는 피지배민족의 열악한 주생활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45년 해방 후 원도심의 일본식 주택에 한국인이 거주하면서 생활 방식의 차이로 주택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1960년대까지 일부 변두리에 주택 개발이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주택 건설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부터였다. 택지 개발을 통해 1층이나 2층 규모의 단독주택이 본격적으로 지어졌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파트 단지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5층 규모의 저층 아파트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15층의 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건설되었고 2000년대를 넘어서는 20층 이상의 아파트 단지가 주류를 이루면서 군산 지역 주생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전근대 군산 지역의 주생활]
군산에서 근대 이전의 주생활을 알 수 있는 주택은 대체로 19세기 후반에서 1920년대까지의 시기에 지어진 고택들이다. 군산의 고택들은 대부분 一자형 주택이다. 전통적으로 남부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군산 지역의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련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군산 지역 고택에서는 다양한 수장 공간의 발달이 나타난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고, 안방과 건넌방 뒤쪽에는 고방과 벽장을 둔 전후 툇간형의 평면이 주로 나타난다. 또한 부엌의 뒤쪽에 별도의 광을 두기도 하고, 안방과 부엌의 천장 위쪽으로 안방에서 계단으로 출입할 수 있는 다락을 두어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근대 이전 군산의 주생활이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고택들은 군산 도심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논과 밭의 경작지를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주생활]
1899년 개항과 함께 군산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었다. 거류지 조성을 위해 계획한 사각형의 도시 블록과 그것을 둘러싸는 격자형 가로망이 현재의 영화동과 중앙로 1가에 해당하는 거류지 중앙의 낮은 평지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식 목조 주택 형식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1층 또는 2층 건물로 벽체는 심벽에 목재 비늘판벽과 회벽 등으로 마감하였고, 지붕은 박공이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어 마감하였다.
지붕과 벽체, 창호, 차양 등에서 일본식 주택 건축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내부 공간에서 방들은 속복도를 통해 연결되고 다다미를 깔았으며 오시이레[押し入れ, 벽장]와 도코노마[床の間, 장식 공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신흥동 일본식 가옥과 같은 규모가 큰 일본식 주택도 지어졌고 이영춘 가옥과 같은 독특한 특성을 가진 별장도 지어졌다.
반면, 한국인들의 주생활은 매우 열악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동안 고율의 소작료를 견디다 못해 농촌에서 군산으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이 된 한국인들은 둔율동, 월명동, 개복동, 창성동 등 구릉 지역에 ‘토막’ 이라는 이름의 움막 형태의 흙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남자들은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자들은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와 미선공을 하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하였다.
[1960년대~1970년대 군산 지역의 주생활]
1945년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명산동, 월명동, 신창동, 신흥동, 영화동 일대의 주택가는 거주 주체가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뀜에 따라 가옥 내부도 다다미에서 온돌을 가진 가옥으로 구조가 변경되었다.
1951년에 설치한 군산의 피난민 수용소에는 56,654명의 피난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해망동, 장미동, 흥남동, 선양동, 신창동, 송창동, 구암동, 경암동 등지에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도심 곳곳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을 실시하여 일부 변두리의 농경지와 구릉지가 주거 및 상업 지역으로 용도 변경되었다. 삼학동, 문화동, 명산동 일대의 변두리에 주택 지역과 상권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의 발전 축이 나운동, 수성동, 사정동, 구암동, 조촌동 방향으로 팽창되면서 택지 개발을 통해 나운동, 문화동, 수송동, 산북동, 소룡동, 사정동, 조촌동, 지곡동에 새로운 주택 지구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이후 군산 지역의 주생활]
1979년 5월 군산 최초의 아파트인 월명 아파트가 세워진 이래 3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아파트는 군산시 주택 유형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늘어나면서 주생활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 초반 지어진 5층 규모의 주공 아파트 3개 단지를 시작으로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대기업 건설사의 민영 아파트 단지가 나운동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까지 15층 이상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나운동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나운동을 벗어나 수송동으로도 아파트 단지가 확산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수송동에 20층 아파트로 구성된 300세대~700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수송동이 군산의 새로운 도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는 군산에도 30층 이상 규모의 주상복합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지속적인 주생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