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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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克智 |
이칭/별칭 | 택중(擇仲),모악(暮岳),충숙(忠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중(擇仲).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의를 지낸 권령(權齡)이고 할아버지는 상주목사 출신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권박(權博)이다. 아버지는 종묘서령을 역임하고 좌참찬에 추증된 권덕유(權德裕)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우찬성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1466~1543]의 딸이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 동생은 사산감역관을 지낸 권극관(權克寬)이다.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병마사 이이수(李頤壽)의 딸이다.
[활동 사항]
권극지(權克智)[1538~1592]는 1558년(명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춘추관의 기주관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봉교와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형조좌랑·병조좌랑에 이어 충청도사, 직장, 사예, 사성, 직제학,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대사헌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91년 형조참판에 이어 동지경연, 예조판서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 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맡아 밤낮으로 나랏일을 챙기다 병을 얻어 사직하였다. 전란 걱정에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다가 4월 28일 피를 토하고 죽었다.
권극지는 표(表)와 책(策)을 짓는 솜씨가 뛰어나 문관을 대상으로 한 정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또한 공과 사가 분명하고, 일 처리를 합리적으로 하였다. 한번은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도량이 좁다고 직언하여 노여움을 샀다. “어떤 일이 그렇단 말인가?” 하고 묻자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혀 임금이 아무 말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묘소]
권극지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평화로]에 있다. 부인은 1617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양주군 천전리에 안장하였다. 사위인 좌의정 대제학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외손 12세손 권부승(權溥承)이 썼다. 최근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