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301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향교를 지켜야지]

강상철[1927년생]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개령향교에 오른다. 비가 새는 구석은 없는지, 담장은 멀쩡한지, 마치 어린아이 돌보듯 매일 개령향교를 보살피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일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지.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자가 대뜸 향교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 말문이 탁 막히더라고.”

개령향교 전교(典校)[향교의 전반적인 운영을 총괄하는 대표] 강상철 씨는 개령면 동부리 개령초등학교 옆 도로 변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세인들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질타하였다. 강상철 씨는 1927년생으로 올해 84세라고 하는데, 다소 마르긴 했지만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전형적인 강골 선비의 기상이 넘쳤다.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 유교의 본산이 아닌가 말이야.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교육이 모두 향교로부터 나왔는데, 향교가 뭐하는 곳인지조차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개령향교의 창건부터 향교의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설명하는 강상철 씨의 목소리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이 넘쳐흘렀다.

[강상철 씨의 인생 유전]

강상철 씨는 동부리 인근의 양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님이 자녀들 교육을 위해 개령초등학교개령중학교가 있는 동부리로 이사를 왔다. 강상철 씨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곧 17세 되던 해에 철도양성소에 들어갔고, 이후 안동역과 점촌역 등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아포역대신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과 함께 개령농업협동조합에서 지도부장으로 7년간 근무를 했다.

“선친이 개령향교 장의(掌議)[향교의 일정 분야를 책임진 임원]를 오래도록 하셨어. 나도 향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별로 출입은 하지 않았지. 18년쯤 전인데, 어느 날 대제를 지내야 되는데 눈 밝은 사람이 없다고 딱 한 번만 와서 접수 좀 보라고 해서 갔디만[갔더니], 그게 고만[그만] 오늘날까지 온 기라.”

[아버지의 뒤를 잇다]

개령향교 장의로 봉직하다 사망한 아버지 강태석의 뒤를 이어, 1992년 우연한 기회에 향교에 몸을 담은 지도 어언 18년이 흐른 강상철 씨는, 장의와 총무를 거쳐 2009년부터 향교의 최고위직인 전교에 올랐다.

강상철 씨를 졸라 향교 구경을 청하여 승낙을 받은 필자는, 이왕이면 향교의 살림살이를 가늠해 보고 싶은 욕심에 총무도 뵙기를 청했다. 그러자 불과 10분도 안 돼 김석암[1931년생]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는데, 바로 이웃한 서부리`에 산다고는 하지만 79세의 어른을 뵙자고 한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다.

강상철 씨의 집을 나서 계림사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1백여m 남짓 오르자, 감천 방향으로 한껏 솟아 있는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저 옛날 젊은이들이 한가득 몰려 앉아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울려 퍼졌을 향교 골짜기가 지금은 적막함으로 가득하다.

[향교에 사람이 없어]

“요새[요즘] 향교의 가장 큰 문제는 젊은 사람이 없다는 기라. 저 사람을 보라고. 총무 나이가 80이니 말을 해서 뭐해. 지금이야 향교 기능이 줄어 가꼬 1년에 두 번 기로연(耆老宴)[경로 효친을 선양하기 위해 나라에서 장수한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던 의식]하고 석전대제(釋奠大祭)[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 지내는 것이 전분데도 음식 다 장만해 놓고 와서 먹고 가라케도 인간들이 와야 말이지. 장[항상] 오는 노인네들만 벅작거리지[왔다 갔다 하지].”

강상철 씨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던 김석암 씨가 “시에서 1년에 백여만 원 남짓 주는 관리비 가지고는 우째[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청소 몇 번 하고 풀약[제초제] 한두 번 뿌리고 나면 없는걸 뭐. 충효교실이라고 해서 학교장한테 사정사정해서 아들 몇 놈 데려다 교육시켜 볼라카마[보려고 하면], 이놈들이 야금야금 죄다[전부] 내빼 뿌리여[도망가]. 우리들 죽고 나면 향교가 우째[어떻게] 돌아갈란지, 참…….” 한다.

향교 살림살이를 책임진 연로한 총무 김석암 씨의 푸념이 주름진 얼굴만큼이나 골 깊게 느껴진다.

“요새는 저 대나무 땜에 잠이 안 와. 저거 보라고. 막 번저[확산되어] 들어온다니까. 언제부터 저걸 비고[베고] 싶어도 이제는 힘이 없어서 못한단 말이지.”

마을로 내려갈 때는 올라왔던 오른쪽 계단이 아닌 왼쪽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는 법도를 알려 주던 강상철 씨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향교를 덮쳐오는 대나무를 걱정했다. 마치 무분별하게 밀려드는 외래문화에 우리 전통문화가 매몰되어 가는 세태를 걱정하기라도 하듯이.

[정보제공]

  • •  강상철(남, 1927년생, 개령면 동부리 주민, 개령향교 전교)
  • •  김석암(남, 1931년생, 개령면 서부리 주민, 개령향교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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