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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83
한자 知禮戰鬪
영어음역 Jirye Jeontu
영어의미역 Jirye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592년 7월 17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황응남|서예원|여대로|권응성|박이룡|강절

[정의]

임진왜란 때 지례현[지금의 김천시]에서 의병 연합군이 왜군을 섬멸한 전투.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들은 교통로를 따라 한양으로 직행하였으나 후방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공격을 가하자 1592년 5월 초 한양 함락 후 각 도를 분담하여 공격하는 전술을 택하였다. 이때 고바야가와 부대는 전라도를 맡아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처음 창원에서 남원으로 직행하려다가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에게 길이 막혀 김산으로 들어와 지례·김산·선산·개령 등지에서 흩어져 주둔하였다.

[경과]

7월 17일 지례·김산의 왜군이 거창으로 향하다가 우두령에서 김면(金沔)이 이끄는 의병들에게 패하여 지례로 되돌아왔다. 또 왜적의 한 부대가 황간·순양·무주·금산을 거쳐 전주로 가려다가 권율(權慄) 장군에게 금산에서 패하고 무주를 거쳐 대덕·지례로 후퇴하였다. 전라도로 진출하다 예봉이 꺾여 지례로 후퇴한 왜군 1500여 명은 7월 29일 지례향교에서 행군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때 의병 연합군이 창고 담장을 에워싸고 담장 안에 장작을 쌓아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창고는 불바다가 되었고, 우왕좌왕하는 왜군을 향해 사방에서 화살을 퍼부어 왜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겨우 도망친 10여 명이 화상으로 인해 멀리 못 가고 객사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죽었다. 그러나 같이 끌려온 부녀자들도 모두 타죽는 비극을 맞았다.

지례 전투에 참가한 의병군은 당시 신창[거창군 운양면]에 포진하였는데, 거창·고령·지례·김산 등지에서 휘하 부대를 파견하였던 김면 의병 총대장이 상도아장 황응남, 중아장 서예원(徐禮元)을 지례에 급파하였고, 그 병력은 의병 대장 여대로(呂大老)의 군병, 권응성(權應聖) 휘하의 500명, 황간 의병장 박이룡(朴以龍)의 군병, 영동 출신 의병장 한명윤(韓明胤)[김면의 종사관]과 회덕 출신 의병장 강절[김면의 종사관]의 군병 등 모두 1,500명이었다.

[결과]

지례 전투가 끝난 직후 김면은 합천군수 배설(裵楔)에게 도망친 왜병을 추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배설은 수령으로서 어찌 백면서생의 지휘를 받으랴 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뒤에 배설은 군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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