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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91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음역 Donghak Nongmin Undong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Move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결 1894년 10월연표보기
발생|시작 1894년 8월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농민 운동
관련 인물/단체 편보언|강주연|배재연|김정문|강기선|권봉제|조순재|장기원

[정의]

1894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건 정부의 수탈과 탐학에 반대하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일으킨 운동.

[역사적 배경]

김천 지방에 동학이 전파된 때는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시기였다. 1890년 11월 최시형은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용호동 김창섭의 집에 머물면서 내수통문을 각 읍에 포고하였다. 김천에서 농민군이 조직된 시기는 대체로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후일 것으로 보이며, 1894년 8월 무렵 김천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김천의 동학 조직은 김천장터를 비롯하여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봉산면 등에 퍼져 있었다. 또한 김천군의 동학 주요 인물 가운데는 양반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과]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폐정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탐관오리 및 횡포한 부호에 대한 엄정, 불량한 양반과 유림에 대한 징벌, 노비 문서 소각, 칠반천인의 대우 개선, 백정의 평양립(平壤笠) 철폐, 청춘과부의 재혼 허용, 무명잡세 허용, 각종 공사채 무효, 인재 위주의 관리 채용, 토지 평균 분작 등이었다.

김천군의 지주들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당시 승지였던 봉계의 조시영, 구성면 광명리 기동의 여영필, 여위룡, 배헌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위룡과 그의 아들 여영조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들 여씨 집안의 토지는 기동과 그 주변에 많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들은 소작농에 대한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소작인들을 무시하는 태도 또한 심했기에 소작들인에게 인심을 많이 잃었다. 1894년 9월에는 김산과 지례에서도 일부 지주에 대한 동학 농민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특히 김산의 여영조가 공격을 받았다.

1894년 9월 교주 최시형이 김산의 도집강 편보언(片甫彦)에게 기군령을 내리자, 편보언은 농민군을 이끌고 상주와 선산을 공략하였고, 선산군 해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또 편보언은 각처 접주들에게 기군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강주연은 죽정, 배재연(裵宰演)은 신하, 김정문은 기동, 강기선(姜基善)은 하기동, 권봉제(權鳳濟)는 장암, 조순재(曺舜在)는 봉계,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농민군을 무장시키고 대기하였다.

[결과]

김천 지방의 동학 농민군은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보낸 남영병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남영병은 9월 26일 선산에서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10월 5일 개령을 거쳐 김산에 들어왔다. 10월 6일 농민군 강기선은 남영병에 붙잡혀 곤장을 맞은 뒤 총살당하였다. 10월 7일에는 공자동에 있던 농민군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으며, 10월 8일에는 지례에서 농민군 4명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해 김천 일대의 동학 농민군은 패퇴하였고, 기존의 질서가 복구되었다.

[의의 및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최고봉에 위치하였다. 위로는 갑오개혁의 추진력으로 작용하였고, 아래로는 반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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