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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94
한자 國債報償運動
영어음역 Gukchae Bosang Undong
영어의미역 National Debt Compensatio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외채 상환 운동.

[개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아 자주권을 수호하려고 1907년에 시작된 운동이다. 1907년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에 대한 외채가 1300만 원에 이르렀고, 국가 재정으로는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 정책에 깊숙이 개입하여 차관을 늘려 한국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켜 나가려 하였다. 이에 국채를 갚아 자주권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부산에서 발의되고 대구를 시발점으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의 달성광문사[회장 김광제, 부회장 서상돈]와 대동광문회[회장 박해령] 등 16명의 계몽 운동가가 발기하여 「국채 1000만원 보상 취지서」를 전국에 돌리자 그 호응이 매우 컸다. 이 취지서의 요지는 “대한국민 천만이 담배를 끊어 1인당 한 달간 담배 값 20전[1원은 백전]씩 3개월간 저축하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 금주 단연 운동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내용]

김천 지방에서도 국채 보상을 통한 자주권 수호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1907년 2월 20일에 김천군 금주단연회가 조직되었으며, 뒤이어 각 면에도 금주단연회가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신보』에 금릉면 인사 금주연(禁酒煙)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경북 김천군 금릉면 신음동(新音洞)에서는 음력 정월부터 금주단연회를 조직한바 발기한 청년은 물론이거니와 동중(洞中) 부노(父老)까지 소비 절약의 주의 아래 이를 실행중인데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황의필(黃義弼), 간사 백남영(白南泳), 위원 김경하(金璟夏)”

[변천]

국채보상운동에 당황한 일본은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문사 내에 설치한 국채보상지원회총합소의 간부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 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금하는가 하면 송병준 등의 친일 단체인 일진회로 하여금 의연금 횡령으로 보상회 간부 몇 사람만 살찌운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하자 국채 보상 운동은 점차 퇴조하여 갔다.

[의의와 평가]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계몽 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키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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