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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02
한자 衡平運動
영어음역 Hyeongpyeong Undong
영어의미역 Social Equalit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1922년연표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사 김천지사 설립]

형평사 김천지사는 1922년 당시 김천군에 거주하던 백정들이 신분 해방을 위해 만든 인권 운동 단체였다. 창립 이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활동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1925년 김천군에서 면협의원 선거에 형평지사 회원이 개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내용은 면협의원 선거에 지역민들이 면협의원 후보로 형평분사 윤점백(尹點伯)을 추천하자 지역의 노년층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지역의 기자들은 『동아일보』에 ‘김천인이여 각성하라’는 제목으로 형평사원을 비난하는 노년층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실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천형평지사는 지역 사회 운동 단체의 지원을 받으면서 새롭게 활동을 재개하였고 1925년 12월 9일 김천군 지례면에 지례형평분사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12월 25일에는 김천형평분사 창립 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출발을 알리려 했으나 일제 관헌의 방해로 기념식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식에서 정위단(正衛團)과 청년회 결성을 결의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정위단을 조직하고, 형평분사 내부에 청년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12월 31일 김천형평지사와 정위단은 연합 간부회를 개최하여 회관과 야학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그 준비 위원을 선정하였다. 야학은 1926년 1월 16일부터 이해동(李海同), 이실경(李實京) 등 2명의 교사와 30여 명의 학생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천형평지사는 같은 해 2월 13일에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대우 개선에 관한 건, 생활 문제의 건, 교육 문제의 건, 감세 사건에 관한 건, 지방 각 단체 문제에 관한 건, 수평사 방문의 건, 순회강연의 건, 회원 친목의 건, 기타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 또한 임시 총회 직후에는 집행 위원회를 열고 형평청년부를 형평청년회로 개칭하여 확대 운영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천형평지사는 자신들의 신분적 차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지속되던 백정에 대한 차별적 관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1934년 10월 21일 김천군 남면 옥산동에서 형평지사 회원과 동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천 지역에는 조선 시대부터 백정 신분을 가진 자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이들의 신분 해방을 위한 인권 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된 신분 차별 관습과 조선인의 사회 운동에 민감하게 대응하던 일제 관헌의 탄압적 태도 속에서 김천형평분사의 활동 공간은 매우 협소하였다. 그렇지만 전근대적 신분제의 철폐를 주장한 김천의 형평운동은 근대 시민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경주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5. 9. 9·1925. 11. 25·1925. 12. 3·1925. 12. 12·1925. 12. 17·1925. 12. 27·1926. 1. 4·1926. 1. 8·1926. 1. 14·1926. 1. 19·1926. 2. 15·1926. 2. 17·1925. 4. 23·1928. 2. 11·1934. 10. 28·1934. 10. 27·1934. 11. 9)
  • 『시대일보』(1925. 12. 21·1925. 12. 28)
  • 『조선중앙일보』(1935. 5. 18)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0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기자들은 『동아일보』에 ‘김천인여 각성하라’는 제목으로 ->기자들은 『동아일보』에 ‘김천인이여 각성하라’는 제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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