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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43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음역 Yugio jeonjaeng
영어의미역 Korean Wa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북한이 남한을 침입하여 경상북도 김천시를 포함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에 의해 전쟁이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한반도 전역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민족 간 전쟁으로 유엔 연합군과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띤 전쟁이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전에 ‘6·25 동란’ 또는 ‘6·25 사변’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동란’ 또는 ‘사변’보다는 전쟁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데, 6·25전쟁 또는 한국 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조선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조선은 북한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전투력을 비교해 보면 우선 지상군의 경우 국군은 9만 6000여 명, 북한군은 19만 6000여 명이었다. 해군의 경우 국군은 7,000여 명, 북한군은 4,700여 명이었다. 공군의 경우 국군은 1,900여 명, 북한군은 2,000여 명 정도였다. 전체 병력은 국군은 10만 5000여 명, 북한군은 20만 3000여 명 정도로서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절반 정도였다.

[변천]

1. 전쟁의 1국면

북한군이 총공격하여 개전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6·28], 계속 남진하여 8월에서 9월 사이에 경주·영천·대구·창녕·마산 등 경상도의 일부만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한 시기이다. 6월 28일 국군은 3개의 혼성 사단을 편성하고, 한강 남안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 7월 4일까지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 냈다. 곧 북한의 선제공격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한 남한 정부는 단기적인 패배, 장기적인 승리, 전투의 패배, 전쟁의 승리를 재빠르게 모색, 이 수준에서 모든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미국은 6·25전쟁에 대한 개입을 사실상 결정하고, 38선 이남에 대한 해·공군참전-38선 이북에 대한 해·공군 작전권 허용-지상군 파견 등 개입 범위의 확대를 신속하게 결정해 나갔다. 다만, 미국은 단독 개입보다는 유엔의 추인과 유엔 회원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어 국제적 명분을 확보하면서 개입하였다. 미국은 유엔군의 지휘권을 확보하여 개입하였고, 유엔군의 구성에서도 지상군의 88%, 공군의 98%, 해군의 84%를 차지할 만큼 전쟁의 중요 당사자로 떠올랐다.

미국은 6월 28일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7월 5일에는 미군 1개 대대[일명 스미스 기동부대]와 포병대를 신속히 파견하였다.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따라 일본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 9일에는 대구에 미 8군 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맥아더는 워커 장군을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남한 정부도 작전권을 미군에 이양하였고, 7월 14일부터는 유엔군에 편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6·25전쟁은 민족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1950년 8월 1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을 구축하였다. 북한군은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 대공세와 9월 대공세란 작전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낙동강 전투는 피아간에 운명을 건 총력전이었다.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에 힘입어 총반격을 개시함으로써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2. 전쟁의 2국면

반격을 시도하던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서울을 탈환한[9·28] 후, 38도선을 넘어[9·30] 정주·운산·회천·신흥·이원을 잇는 선까지 나아가는 한편 그 일부가 압록강 변의 초산까지 진격[10·26]하는 기간이다. 북한군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의 서울 진격을 막아내면서, 동부 전선을 통해 주력 부대의 후퇴를 가능하게 하였다.

북한군의 철수는 철수 작전과 장기전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만큼 지휘 체계가 와해되고 병력은 분산되면서 패주하였다. 북한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탈락한 북한군은 남한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38도선을 넘어 북진한 유엔군은 빠른 속도로 북한 지역을 장악하였고,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던 북한 정권은 정반대로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군사적 통일의 대상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3. 전쟁의 3국면

중공군의 개입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총퇴각했다가, 반격을 시도하여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휴전 교섭이 이루어진 시기까지이다. 북한 정권은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중국 역시 유엔군의 중국 국경 접근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결국 중국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의 참전을 감행하였다. 이로써 6·25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유엔군의 작전권을 장악한 미군은 큰 타격을 입으면서 후퇴를 하게 되었고,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유엔군은 평택-충주-삼척으로 이어지는 전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재반격을 시도하였다. 3월 24일에 유엔군과 국군이 다시 38도선을 넘어 북진했으나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4월 중순경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4. 전쟁의 4국면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이 일단락되는 시기이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은 확전 여부를 놓고 고심한 끝에 북진 의사를 강력히 나타낸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를 해임 처리함으로써 더 이상 확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사실상 미국과 영국은 중공군과의 교전과 소련의 참전으로 6·25 전쟁이 세계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며 전쟁을 ‘명예로운 휴전’으로 중단시키려 하고, 이에 전쟁 목적도 ‘통일’이 아닌 ‘전쟁 전 상태 회복’으로 바뀌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① 비무장 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 경계선 설정 문제, ② 휴전 감시 기관 문제, ③ 포로 교환 문제 등이었다. 휴전선 문제는 공산군이 38도선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은 양군의 대치선을 주장하여 서로 맞서다가 결국 대치선으로 타결되었다. 휴전 감시 기관 문제는 유엔군이 추천한 스웨덴·스위스와 공산군이 추천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감시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제 남은 의제는 포로 교환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휴전 회담 협의 과정에서 최대 난관이었다.

회담이 개시된 이래 수차례 교착 상태에 빠졌던 휴전 회담은 소련의 스탈린 사망과 미국 대통령의 교체 이후 부상병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재개되어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에 반발한 남한 정부는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5000명을 독단적으로 석방하였고, 남한에서는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미국은 남한 정부에 대해 상호 안전 보장 조약 체결, 장기간의 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약속하고 한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또한 미국의 휴전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와 공산군 측의 동의로 시작된 지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남한은 북한을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휴전이 한국 국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휴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남한을 휴전협정 당사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전쟁과 김천]

김천에는 1950년 7월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7월 대전 방어를 위한 금강 변 방어선이 무너지자 정부는 대전을 포기하고 대구로 이동하였다. 공산군은 경부선을 따라 영동·김천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7월 30일에 공산군 10사단은 무주를 거쳐 경주 방면으로 나아갔다.

김천의 각 급 학교는 7월 초순에서 중순에 걸쳐 일제히 휴학했다. 7월 중순 남하하는 국군과 경찰은 김천 인근에서 공산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 7월 31일 김천소개령이 내려졌고, 밤 11시에 마지막 경부선 열차가 왜관을 거쳐 대구로 운행하였다.

김천은 7월부터 약 50일 정도 공산군의 점령 아래 놓여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공산군의 중요 전진 기지가 되었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 전투에서 크게 지고,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김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천에서는 공산군 점령 아래 설치되었던 인민위원회 등 모든 기구들이 해체되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구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어 쌍방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했지만, 결국 분단국가 사이의 국경선인 38도선을 휴전선으로 대체시키기만 한 채 휴전되고 말았다. 남한은 38도선 이북 지역이던 철원·화천·간성 일대와 서해 5도를 차지한 반면, 북한은 38도선 이남의 옹진반도와 개성·사천 일원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휴전선이라 부르는 비무장 지대가 임진강-철원-거진 북방에 설정되었다. 또 6·25전쟁은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세계적으로는 동서 냉전을 격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을 통해 전쟁이 아닌 평화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6/24 수정 요청을 하였지만 30일이 넘게 답변 또는 수정 사항이 없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민원은 수정증보를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김천부근 방어전(1950.07.29.~1950.07.31.)에는 미군 제1기병사단, 북한군 3사단, 203전차연대가 참여하였습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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