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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92
한자 東部里古墳群
영어음역 Dongbu-ri Gobungun
영어의미역 Ancient Tombs of Dongbu-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95 일원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배성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5세기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95 일원지도보기
성격 고분군
양식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 石室墳]
크기(높이, 지름) 석실: 4.39m[길이]|1.27m[너비]|1.28m[높이]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신라 시대 고분군.

[위치]

동부리 고분군김천시 개령면 동부리감천(甘川)과 취적봉(吹笛峰)으로 불리는 표고 380m의 감문산성(甘文山城) 사이의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감문산성에서 동남쪽의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동부리 사이로 뻗어 내리는 능선의 하반부에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능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양천리에, 서쪽이 동부리에 속해 있어 행정 구역만 다를 뿐 하나의 고분군에 해당한다.

개령중학교 서편의 구릉 및 사면에도 현재는 고분 흔적이 보이지 않으나 산재된 토기편으로 보아 동부리 고분군의 지군(支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옛 감문소국(甘文小國)의 중심지로 비정되고 있는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동부리·양천리 일대에 대규모의 고분군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 동부리에는 봉토분 8기만 남아 있고 양천리에 포함된 일련의 능선부에는 불과 10여 기의 봉토분만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동부리 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자료는 없다. 다만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지표 조사 보고서에서 내부가 노출된 가칭 제1호분이 간략하게 보고되었다. 현재 어느 고분인지 알 수 없는 이 고분은 개령향교 뒤편 해발 133m 지점의 돌출된 능선에 입지하였다고 하여 대체적인 위치만 알 수 있다. 현재 그 보고서에 기재된 도면의 내부 구조는 현재 일대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고분과 동일한 구조이다.

[형태]

가칭 제1호분의 석실 내부 구조의 장축 방향은 능선 주향과 직교하는 등고선 방향이며, 벽체는 판석을 세워 구성하고 그 위에 개석을 덮은 이른바 판상 석조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이다. 벽석재인 판석은 북 장벽에 3매, 남 장벽에 2매, 양 단벽에 1매씩을 사용하고, 개석은 2매를 사용하였으며 틈이 생긴 부분은 할석으로 보완하여 쌓았다.

석실은 반지하식이며 규모는 길이 4.39m, 너비 1.27m, 높이 1.28m 정도이고 상반부 외측에는 위석으로 쌓여 있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5세기 대에 축조된 고분으로 보이며, 그 밖에 산재된 토기편 중에는 6세기의 신라 단각 고배편이 적지 않게 보이므로 주변으로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다수 분포할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

동부리 고분군 일대에는 5세기 대와 6세기 대 토기의 파편들이 넓은 범위로 산포하고 있는데, 토기 중에는 제5호분으로 임시 설정된 고분에서 6세기 대의 전형적인 신라 짧은 굽다리접시[短脚高杯]가 완형으로 수습된 바 있다.

[현황]

능선부 위쪽으로는 주로 소나무와 참나무 등 각종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봉분의 외형 또는 그 일부가 파악되는 봉토분은 10기가 확인될 뿐이다. 능선부 아래쪽에는 과수원 등 경작에 의해 크게 개간되어 있는데, 능선부 전체에서 삼국 시대 토기편들이 넓은 범위로 산포하고 있으므로 경작지를 포함한 능선 전체가 고분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간략 조사된 판상 석조 구덩식 돌방[竪穴式石室]의 규모가 크고 또한 고대 감문국(甘文國)의 중심지 일대에 고분군이 형성된 것을 볼 때 원래는 대규모 고분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작지의 고분들은 개간 당시 인멸되었거나 상당수의 고분들이 지표 아래에 하부만 잔존할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동부리 고분군은 서쪽의 서부리 고분군, 동쪽의 양천리 고분군과 함께 고대 감문소국의 중심지로 알려진 개령면 일대의 주고분군에 해당하고, 그중에서도 중심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봉토분 10기만 유존하는데 모두 도굴을 당해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며,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도 없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간략 조사된 구조 도면과 산재된 토기편 등을 통해 신라 외곽에 해당하는 감천 유역의 고분 문화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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