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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68
한자 鄭萬容
영어음역 Jung man yong
이칭/별칭 구암(懼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682년연표보기
몰년 1765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삼락동 이지재
성격 선비|유학자
성별
본관 영일(迎日)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유학자로 노비 해방을 실천한 인물.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구암(懼庵). 아버지는 정박(鄭璞)이다. 아들은 정사기(鄭師沂)와 정량수를 두었고 손자로는 정혐(鄭馦)이 있다. 정혐은 1789년(정조 13) 식년시에 급제하여 할아버지의 명성과 가세를 이어갔다.

[활동 사항]

정만용(鄭萬容)은 1682년(숙종 8)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신리 봉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함과 호학(好學)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장하면서 학문이 날로 깊어졌으나, 과거를 보지 않았다. 주변의 유림에서 학덕을 높이 평가하고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회갑을 맞은 1742년(영조 18) 자신의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를 해방시켜 신분제 철폐의 선구자가 되었다. 집안의 사노(私奴) 50명에게 종답(宗沓) 50마지기를 골고루 나누어 주어 생업의 터전으로 삼게 한 뒤 정전법에 의거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었다. 이는 유학을 통해 익힌 왕도 정치의 이상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었다.

김산군수가 경상감사에게 정만용의 공적을 상신하면서 선물을 보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군수가 거듭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여 선비의 절개와 공리를 우선하는 유자(儒者)의 길을 걸었다. 정만용이 행한 노비 해방의 문서는 행정안전자치부 지방행정연수원에 보관되어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봉계(鳳溪)의 직동마을은 일명 곧은골로 불린다. 정만용은 둘째 아들 정량수를 봉계마을의 가장 윗마을로 분가를 시켰고, 이때 곧게 올라가서 터전을 닦았다 하여 직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조정에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하였고, 영일 정씨 문중은 1860년(철종 11) 김천시 삼락동 금평에 이지재(履之齋)를 건립하여 공적을 기리고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2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학덕을 높이 평가하고 유일(遺佚)로 천거하였으나 ->학덕을 높이 평가하고 유일(遺逸)로 천거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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