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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96
한자 姜汝㦿
영어음역 Gang Yeoho
이칭/별칭 계숙(啓叔),기재(耆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619년연표보기
활동 1654년연표보기
활동 1675년연표보기
몰년 1683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모원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진주(晉州)
대표 관직 장예원판결사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숙(啓叔), 호는 기재(耆齋). 할아버지는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강부(姜符)이고, 아버지는 남와(南窩) 강설(姜渫)이다. 강여호는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여대로(呂大老)이며, 장인은 강용사(姜用俟)이다. 강여호의 서자(庶子)인 강필중(姜必中)은 허통(許通)되어 1708년(숙종 34) 식년회시(式年會試)에 합격하였다.

[활동 사항]

강여호(姜汝㦿)[1619~1683]는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원헌납·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사헌부집의·홍문관부수찬을 역임하였고, 1675년(숙종 1) 홍문록에 선발되어 예장원판결사를 지냈다. 진주목사, 나주목사, 횡성부사, 종성부사를 거치면서 백성의 소송을 공정하고 바르게 처리하여 현민을 덕으로 교화하여 백성들이 감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횡성부사로 재임할 때에 집안에 혼사가 있어 쌀 넉 섬을 변통해 달라는 전갈을 받고 “사사로운 내 집의 결혼 비용에 국고를 덜 수는 없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관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위해 애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왕에게는 극간을 서슴지 않았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왕의 직언에 응해 시폐(時弊)에 대해 수천 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 소지품이 침구(寢具)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년에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김산향교 중건에 힘써 고장의 흥학을 육영하였다. 1683년(숙종 9)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있으며, 이헌경(李獻慶)이 비문에 찬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천시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에 아버지 강설강여호를 추향하는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또한 강여호김천시 조마면 강곡리에 위치한 자동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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