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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97
한자 鄭錫堅
영어음역 Jeong Seokgyeon
이칭/별칭 덕용,자건(子建),한벽재(寒碧齋),산자관원(山字官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44년연표보기
활동 1469년연표보기
활동 1474년연표보기
활동 1483년연표보기
활동 1486년연표보기
활동 1487년연표보기
활동 1489년연표보기
활동 1492년연표보기
활동 1493년연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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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1497년연표보기
활동 1498년연표보기
몰년 150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해주(海州)
대표 관직 사간원대사간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덕용·자건(子建), 호는 한벽재(寒碧齋). 증조할아버지는 정윤성(鄭允成)이고, 할아버지는 정희언(鄭希彦)이며, 아버지는 단천교도(端川敎導) 정유공(鄭由恭)이다. 형으로 정철견(鄭鐵堅)과 정은견(鄭銀堅)이 있다.

[활동 사항]

정석견(鄭錫堅)[1444~1500]은 지금의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탄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25세가 되던 1469년(예종 1) 증광시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얻었다. 1474년(성종 5)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안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482년(성종 13) 사헌부대사헌 채수(蔡壽)가 문학(文學)과 이재(吏才)가 모두 우수하다고 천거하였으나 서용되지 못하자 사헌부지평 조위(曺偉)가 거듭 천거하였다.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1483년(성종 14)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때 사간원정언으로서 이조의 인재 서용 문제를 거론하면서 강상(綱常)과 국가에 관계되어 이미 중한 죄를 받은 자와 탐오하고 불법한데도 죄상이 드러나지 않은 자를 철저하게 가려 쓸 것을 제의하였다. 또한 천추사 서장관의 경험을 토대로 장유성(張有誠)을 정조부사(正朝副使)에 임명한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송영(宋瑛)의 아내가 분경(奔競)한 것을 들어 파직을 요청하기도 하여 성품의 강직한 면을 드러냈다.

이조좌랑을 거쳐 1486년(성종 17) 수사헌부지평(守司憲府持平)이 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때 경연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중용(中庸)』 및 『대학(大學)』 등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성종정석견의 건의를 받아들여 『논어(論語)』를 강하게 하였다.

1489년(성종 20) 이조정랑이 되어 왕명으로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허침(許琛)과 함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을 산정(刪定)하였다. 곧바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유자광(柳子光)을 장악원제조로 삼은 것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다. 그 이유는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어야 하는데 유자광은 비록 궁검(弓劍)과 문묵(文墨)의 재주는 있지만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협객(俠客)과 같아 나라의 근본을 다스리는 예악(禮樂)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정석견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성종은 그의 말이 순박하고 정직하여 쓸 만한 사람이지만 나이가 들고 노쇠하므로 기력에 합당한 자리를 주게 하여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1490년(성종 21) 승정원에 의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심(金諶)·이조정랑(吏曹正郞) 강경서(姜景敍)·교서관정자(校書館正子) 유숭조(柳崇祖)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고, 1492년(성종 23) 수사헌부집의(守司憲府執義)가 되었다. 당시 왜적 70여 명이 고성을 침범하여 민가(民家)를 공겁(攻怯)하고 재물을 약탈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경차관으로서 살해된 자의 수와 피해를 입은 민호 등 실정을 살피고 변장을 국문하였다. 김해부사를 잠시 거쳐 1493년(성종 24)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왕을 지근에서 모셨다.

1495년 승정원동부승지 겸 지성균관사가 되었으나 전년에 변장을 국문할 때 실상을 들어 아뢰지 아니하고 천총(天聰)을 기만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해 연산군이 즉위하고 병조참지를 거쳐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폐비의 추존문제가 거론되자 선왕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하였다. 다만 성심과 경의를 펴서 효도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정리와 예절에 합당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때 정석견의 형인 정철견이 일민(逸民)으로 군자감주부가 되었다. 학식은 있으나 벼슬길을 구하지 않고 자제들을 옳은 길로 가르친 공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1497년(연산군 3) 임사홍(任士洪)의 가자에 반대하였으며,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정석견연산군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여러 차례 간하였고, 곧 이조참판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강귀손, 유자광 등이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았으며, 정석견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아 동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더 이상의 처벌은 없었다.

정석견은 일찍이 형인 정철견과 정은견 그리고 조카 정붕(鄭鵬)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고, 김종직·김굉필(金宏弼)·조위·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하고 강마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언제나 청빈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고, 영남 신진 사류의 일인으로 후일 사림파 형성은 물론 김천의 학풍과 향풍을 진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천 지방이 후학(後學)을 권장하고 풍속(風俗)이 바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500년(연산군 6) 정석견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은 그의 제사에 부의하는 문제를 정승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당시 정승들은 파면된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시임(時任)의 종2품 이상 관원과는 차이가 있다는 의견을 견지하였고, 정문형(鄭文炯)만이 죄를 받고 산관으로 되었을 뿐 고신(告身)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치제(致祭)·치부(致賻)하는 것이 예사(例事)라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은 결국 죄가 가볍지 않으니 부제(賻祭)하지 말라고 결정함으로써 정석견의 학덕과 공적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탄동마을에 있으며, 강제지(姜霽知)가 찬(撰)한 묘갈(墓碣)이 있다.

[상훈과 추모]

선산의 경락사(景洛祠)와에 제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5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이때 경연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이때 경연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〇 서명 태깅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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