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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녹주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6
한자 洪祿遒
영어음역 Hong Nokju
이칭/별칭 희순(熙順)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1269년연표보기
활동 1277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성격 무신
성별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 세자조호

[정의]

고려 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홍균(洪鈞)이다.

[활동 사항]

홍녹주(洪祿遒)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에서 태어났으며, 무예에 조예가 깊고 용감하였다.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서북면 지역은 아버지 홍균이 두 번이나 역임한 곳으로, 홍균의 은공과 선정을 잊지 않은 백성들은 홍녹주를 열렬히 환대해 주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열흘이 되었을 때 서북병마기관(西北兵馬記官) 최탄(崔坦)·한신(韓愼) 등이 서경유수(西京留守) 최연(崔年)을 죽이고 서북의 제성(諸城)을 가지고 몽골에 반부(叛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연(林衍)원종을 폐하고 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세운 데 대한 반발이었다.

최탄한신홍녹주에게 “전왕(前王)이 두 번 상국에 입조(入朝)하여 동방을 안정하게 하였는데, 임연이 무슨 공덕이 있기에 마음대로 우리 왕을 폐위하는가? 조정에 충신이 없으니, 우리가 분격하여 수악(首惡)을 죽이고 우리 왕을 다시 모시고자 한다.”라며 동참을 강요하였지만 홍녹주는 고려의 백성을 배반할 수 없다고 보아 탈출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1274년(원종 15) 봄에 원나라는 총관(摠管) 찰홀(察忽)을 고려에 보내 감독하여 전함 300척을 건조하게 하였다. 홍녹주는 우복야로서 나주도도지휘사(羅州道都指揮使)가 되어 원나라가 주문한 공장(工匠)과 인부 3만 500여 명을 징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천관산에서 배를 만들 재목을 준비하였는데, 이때 역마(驛馬)가 연락이 잘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이 매우 번거롭고 바쁘고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같이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1277년(충렬왕 3) 김방경(金方慶)이 세자사(世子師)가 되었을 때, 홍녹주는 세자조호(世子調護)가 되었다. 훗날 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희순(熙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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