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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23
한자 李世仁
영어음역 Yi Sein
이칭/별칭 원지(元之),연담(蓮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52년연표보기
활동 1486년연표보기
활동 1500년연표보기
활동 1501년연표보기
활동 1504년연표보기
활동 1506년연표보기
활동 1507년연표보기
몰년 1516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유배|이배지 전라남도 나주시
유배|이배지 경상북도 김천시
묘소|단소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성산(星山)
대표 관직 이조참의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원지(元之), 호는 연담(蓮潭). 고려 시대 좌정언(左正言)을 지낸 이여량(李汝良)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진사(進士)를 지낸 이벽(李壁)이다. 부인은 현령(縣令)을 지낸 신천 강씨 강응겸(康應謙)의 딸이다. 아들은 이항(李沆)이다. 이항연산군조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을 하였다. 호당(湖堂)과 옥당(玉堂)을 두루 거쳐 1519년(중종 14) 영남관찰사를 역임하고 뒤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활동 사항]

이세인(李世仁)[1452~1516]은 김산(金山)[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구미시 선산읍 봉남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음]. 부모를 일찍 여의고 문호(門戶)조차 부진하였으나 가문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여겼다. 또한 배움을 위해 스승이 있는 곳이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선산도호부사로 부임하자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매계(梅溪) 조위(曺偉)와 아주 막역한 교분으로 늘 정사를 걱정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35세가 되던 1486년(성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과 함께 문과병과(文科丙科)에 합격하여 정자(正子)·박사(博士)·주부(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승정원(承政院) 재직 시절에 최부(崔溥), 박증영(朴增榮), 권오복(權五福), 김감(金勘), 강혼(姜渾), 유숭조(柳崇祖), 정붕(鄭鵬), 이과(李顆), 정여창(鄭汝昌) 등 10명과 함께 뽑혀 천문(天文), 산학(算學)을 익혔다. 그 후 사헌부감찰, 교리(校理), 형조좌랑, 사헌부장령,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전한, 사간원사간, 홍문관부제학, 홍문관직제학, 형조참의,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황해도관찰사, 승정원좌승지,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사헌부장령으로 재직할 때 개성부와 한산군의 성(城) 쌓기가 백성들에게 심한 고통임을 상소하여 부역을 덜게 하였다. 박원종(朴元宗)이 무신(武臣)으로 이조참의에 제수되자 부당하다고 간(諫)하였다. 1500년(연산군 6)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킨 유자광(柳子光)의 탄핵소를 올렸다가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청암역(靑巖驛)으로 유배를 갔으나 이듬해 유배가 풀려 대동도찰방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경상도 김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방면된 뒤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에 직제학이 되었다. 직제학이 되자 유자광에 대한 탄핵소를 또 올려 결국 유자광은 유배되었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과로로 병을 얻어 1516년(중종 11)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서거정(徐巨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시(詩)가 실려 있다. 「희차몽여운(戱次夢與韻)」이란 제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암담하여라 산빛은 어두운데/ 아득하여라 바다 기운 침침하다/ 나그네와 더불어 이야기할 이 없고/ 봄이 떠나매 마음에 걸리는 듯/ 저녁이 다하도록 붉은 작약 바라보다가/ 평상을 옮겨 푸른 그늘에 누웠나니/ 그래도 쓸쓸함을 달랠 만한 것/ 날마다 꽃 수풀에 취하여 있다[暗淡山光晦 蒼茫海氣沈 客中無與話 春去若爲心 竟夕看紅藥 移床臥綠陰 猶堪慰寥落 日日醉花林].”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편찬에 수찬관(修撰官)으로 참여하였다. 이채(李采)가 서문을 쓴 『연담이선생문집(蓮潭李先生文集)』 상하 2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좌의정 신용개(申用漑)가 신도비를 찬하고, 국일재(菊逸齋) 노공필(盧公弼)이 묘갈을 썼다. 이장곤(李長坤), 김안국, 신용개, 유순(柳洵), 노공필, 최숙생(崔淑生), 이희보(李希輔), 강혼, 남곤(南袞)이 만사(輓詞)를 작성하였다. 신용개가 찬한 신도비에 “경술에 근본 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았고 기품에는 잡됨이 없고 몸은 병을 몰랐다. 장수하리라 믿었으며 정승과 판서의 물망에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되었다. 20여 년간 세 왕을 보필하고 주로 삼사(三司)에서 벼슬을 하면서 바른말과 정의로운 일에는 앞장섰고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전하며 『명신록(名臣錄)』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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