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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30
한자 李起燦
영어음역 Yi Gich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손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53년 10월 12일연표보기
활동 1895년연표보기
활동 1896년 2월 10일연표보기
활동 1896년 3월 10일연표보기
활동 1896년 4월 11일연표보기
몰년 1908년 1월 13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청송군 서덕면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김천에서 활동한 의병장.

[활동사항]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협공으로 맞서는 관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패하여 김천 지역으로 숨어들었다가 직지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의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1896년 1월 11일 김천 유림(儒林)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키자 이기찬허위(許蔿)와 이기하(李起夏), 이은찬, 조동호 등과 의논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2월 10일 김천 장날을 기해 김천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여기에서 이기찬은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참모장에는 허위, 중군에는 양제안(梁濟安), 선봉에는 윤홍채(尹鴻采)가 선임되었다.

이기찬 부대는 그 해 3월 10일 참모장인 허위의 전략에 따라 먼저 김산군 금릉에 있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압수한 후 무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부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치고 무장 세력의 강화를 위해 인근 지역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했다.

당시 이기찬 부대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할 수 있는 요새인 추풍령을 거점으로 삼았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능한 탁월한 전략으로 규모는 물론 기세도 등등했다. 이에 이기찬 부대는 추풍령과 합천 지방을 장악하고 서울과 부산을 대구·김천 선에서 차단하기 위해 대구로 진격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대구의 관군이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성주와 김산의 의병 부대를 급습한 뒤 이기찬 의병 부대까지 공격하였다. 이때 이은찬과 조동호 등이 포로가 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전투 능력이 부족한 유생과 농민들로 조직된 의병 부대가 아직 전투태세를 충분히 갖추기도 전에 관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기찬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관군의 공격에 대응치 못하고 패퇴했던 의병들 중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여 명을 다시 집결시켜 상주와 김찬의 동지들과 함께 직지사에서 의병을 재편성했다. 1896년 4월 11일 다시 대장으로 추대된 이기찬은 군문도총(軍門都總) 조동석, 참모장 허위, 서기 여영소와 이시좌, 중군장 양제안, 선봉장 윤홍채 등으로 의병 부대를 재정비하고는 진천·영동·황간·문경으로 진출했는데, 이때에는 관군이나 일본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그러나 김천에 진을 구성하여 왜병을 토멸하고자 김천·대구로 출동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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