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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509
한자 新聞
영어음역 Sinmun
영어의미역 Newspaper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우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1946년연표보기
폐간|종간 1949년 4월 17일연표보기
폐간|종간 1955년 7월연표보기
창간 1956년 7월연표보기
창간 1956년 7월연표보기
폐간|종간 1957년 1월연표보기
폐간|종간 1958년 11월연표보기
창간 1960년 10월연표보기
창간 1960년 9월 2일연표보기
폐간|종간 1961년연표보기
폐간|종간 1961년 5월 23일연표보기
창간 1965년 10월 30일연표보기
폐간|종간 1968년연표보기
창간 1990년 1월 1일연표보기
폐간|종간 1991년 8월연표보기
창간 1993년 7월연표보기
폐간|종간 1999년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건이나 화제를 신속히 보도, 해설, 비평하는 정기 간행물.

[개설]

신문은 정기 간행물 형태의 가장 대표적인 언론 매체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신문』을 필두로 일제 강점기와 군사 정권기, 민주화 시기를 거치며 많은 신문이 흥망을 거듭하였다. 일제 치하 김천 지방 출신으로 언론계에서 활약한 사람은 『동아일보』 지국장 이정득을 비롯하여 이강래, 김수길, 박한동, 이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언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의식 계발을 위해 유치원과 학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출신의 김태연은 『조선일보』 초창기의 사회부 기자로서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김준연, 박헌영 등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활달히 전개하였다. 김태연이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일보』의 정간 처분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김태연 등 사회주의 기자 축출을 내걸었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이정득은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1924년부터 『동아일보』 지국장을 맡아 언론, 육영, 청년 및 식산 운동 등에 앞장섰다. 직접 신문을 배달하고 수금하면서 정보를 수집 또는 전달한 그는 금릉유치원, 금릉학원 등 교육 기관 설립과 운영에 헌신했으며 청년회 활동은 물로 지금의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김천고등보통학교 창설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김천 지역에서 발간된 신문으로는 『문화시보』, 『금릉시보』, 『김천어린이신문』, 『대구일보』 부록 『김천보』, 『김천시보』, 『영남신문』, 『경북신문』, 『천릉민보』, 『김천금릉민보』, 『김천신문』, 『새김천신문』, 『황악신문』, 『경북자치신문』, 『문화신문』 등이 있다.

[문화시보]

1946년 5월 김천 출신의 김기수가 대구에서 창간한 『문화시보』를 1948년 4월 김천으로 사옥을 옮겨 온 것이 김천 지역 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1949년 4월 17일 『김천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출판 인쇄 시설을 확장하는 등 6·25 전쟁 이전까지 유일한 주간 향토 신문으로서 시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전란으로 중단되고 1951년 6월 속간한 『김천신문』은 손흥수, 김정환 등이 기자로 활약하다가 1955년 4월 20일 5·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감천 백사장 유세를 특집으로 다룬 것이 화근이 되어 1955년 7월에 폐간되었다.

[금릉시보]

1955년 7월에 『김천신문』이 폐간된 후 1956년 7월 『금릉시보』가 발간되었는데, 발행인 겸 편집인인 변익진이 심문(沈文)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주간 『금릉시보』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창간 초부터 여당 성향이 짙다는 여론으로 일반의 호응도가 약했고 재정난이 겹쳐 지령 3호를 끝으로 1957년 1월 종간되었다.

[김천어린이신문]

1956년 2월 『대구매일신문』 부록판으로 손흥수가 출간하였다. 타블로이드판으로 아동 문예 작품을 위주로 하여 학원 소식 등을 주간으로 보도했고 김천 지역 내의 60개 초등학교 아동을 상대로 정서 교육과 문예 교실 역할을 하였다. 아동 문학상을 마련하여 지도 교사의 열의와 아동들의 창작열을 북돋우고 학교 간의 경쟁열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성인 학교, 공민학교, 고아원 등에 무료로 신문을 배부하기도 했으나 경영난에 봉착하여 창간 1년 반 만인 1957년에 폐간하였다.

[대구일보 부록 김천보]

1956년 7월 『대구일보』 지국장 남치홍이 지방 신문이 없어진 데 착안하여 타블로이드판으로 주 1회로 『김천보』를 발행하였다. 무료로 『대구일보』에 끼워 배부하였는데 지방 신문이 없어진 뒤라 반응도 좋았고 『대구일보』의 부수 확장에도 기여하다가 1958년 11월 종간하였다.

[김천시보]

『김천시보』는 1960년 9월 2일자로 허가되어 『김천신문』에서 맥을 이어 온 신문이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류승모, 업무부에 공남수, 교정부에 한봉진, 기자는 도영기, 최진오가 있었으며, 대구에서 온 이준철이 기사 취재를 도왔다. 『김천시보』는 타블로이드 배판으로 매주 금요일 발행되었으며, 대구 카톨릭시보사 출판국에서 인쇄하였다. 김천문화원장 강중구(姜重求)를 중심으로 각계를 망라한 25인으로 후원 단체인 25시회가 조직되었다. 25시회에서 호선(互選)한 정남진을 사장으로 등록하고 강중구, 안지열 등 5인을 운영 위원으로 위촉하여 편집과 운영에 자문을 하도록 하였다. 25시회 회원으로는 강중구, 정남진, 안지열, 김태수, 송재성, 서칠봉, 윤일섭, 유창국 등이 활동하였다. 『김천시보』는 무료로 시내 통장·반장과 면의원, 동장에게 배부했으며 좌담회, 웅변대회 등의 사업도 전개했는데 1961년 군사 혁명이 일어나면서 5월 23일 폐간되었다.

[영남신문]

대구에서 발간되던 주간지 『영남평보』의 판권을 인수한 최재숙이 김천으로 이주해 제호를 『영남신문』으로 바꾸어 1960년 10월 발행하였다. 사옥을 김천시 평화동 동신사 2층에 정하고 인쇄는 대구 카톨릭시보사 출판국에서 하였다. 최재숙이 발행인 겸 총무국장이었고, 사장은 유창국, 편집국장에 이근구, 기자에 김연 등이었다. 『영남신문』은 지형이 2절판으로 색달랐으며 인쇄에 불편이 많아 김천에 인쇄 시설을 갖추려고 할 때 1961년 군사 혁명이 일어나 폐간되고 말았다.

[경북신문]

1960년 11월 남치홍이 창설한 『경북신문』은 5호 활자 타블로이드판으로 주간지였다. 발행인 남치홍이 경영하던 문화인쇄사에서 『경북신문』을 찍어냈는데 김천에는 당시 지방지가 세 개로 늘어나서 언론의 풍성함을 누린 시대였다. 편집에는 김기수, 취재에 김정환 등이 활약했으나 1961년 군사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

[천릉민보]

5·16 군정이 끝나서 제3공화국이 수립되어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어 갈 무렵인 1965년 10월 30일 『천릉민보』가 타블로이드 배판으로 창간되었다. 발행소를 서울 청진동 196번지에 두었으며, 발행인은 이종학, 편집은 이목운으로 하였다. 당시 김천에는 지방지가 없어 시민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경영난으로 1968년 폐간되고 말았다.

[김천금릉민보]

1983년 8월 2일 등록하고 1990년 1월 1일자로 여인섭에 의해 『김천금릉민보』 창간호가 나왔다. 형태는 타블로이드판이며, 한 장짜리 월간지였다. 월간이었기 때문에 속보성 있는 기사보다는 생활 정보, 문화 기사 등을 주로 실었다. 1991년 8월에 20호를 끝으로 『새김천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면서 『김천금릉민보』는 폐간되었다.

[김천신문]

1989년 제6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언론 자율화의 물결을 타고 김중기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등록하여 그해 10월 『김천신문』 소식지 1호를 내고 1990년 3월 25일 격주간 타블로이드판 컬러 16면을 창간호로 발행하였다. 창간 1년만인 1991년 1월 12일 24면으로 증면했으며 그해 7월 10일부터는 격주간을 주간으로, 타블로이드판을 대판으로 바꾸었다. 김천신문사는 1994년 7월 10일에 생활 정보지인 『김천 이모저모』와 통합하였다. 1995년 3월 25일에는 『새김천신문』을 통합하고 1996년 9월 1일에 주식회사로 출범하였다. 대표이사 사장은 김중기이고 편집국장은 권숙월이다.

[새김천신문]

『김천금릉민보』를 인수한 김영만은 발행인에 여인섭, 편집인에 권숙월을 선임하여 1992년 3월 21일 격주간 대판 8면으로 『새김천신문』을 발행하였다. 1면과 8면은 컬러로 하고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고수하였다. 1993년 2월 4일부터 격주간을 주간으로 바꾸고 7월 25일 김두성을 회장으로 영입하였다. 1995년 1월 5일 139호를 끝으로 상주, 구미 지역까지 취재 구역을 넓히고 제호를 『시민신문』으로 바꾸었다. 『시민신문』은 5호를 끝으로 1995년 3월 25일 『김천신문』과 통합하였다.

[황악신문]

『황악신문』은 이현종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1993년 7월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대판 주간으로 63호까지 발행하다 1999년 폐간하였다.

[경북자치신문]

하정태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1995년 10월 4일 『경북자치신문』 창간호를 냈다. 타블로이드로 시작하였다가 1998년 4월 19일 재창간하면서 대판으로 바꾸었고 발행인 하정태, 편집인 정재경, 편집국장 손상용으로 개편하였다. 2001년 11월 23일 사옥을 김천시 평화동으로 이전하였다. 2010년 8월 현재 총 360호를 발행하였다. 현재는 인터넷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천시사』(김천시, 1999)
  • 인터뷰(『김천신문』 편집국장 권숙월, 남, 64세, 2010. 8)
  • 인터뷰(『경북자치신문』 발행인 하정태, 남, 59세,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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