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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959
한자 社會主義運動
영어음역 Sahoejuui Undong
영어의미역 Socialis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포함하여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위하여 전개되었던 사회 운동.

[개설]

3·1 운동 이후 민족 운동 상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하였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김천은 경상북도 지방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 중 한 곳이었으며, 대표적 공산주의자인 김단야(金丹冶)[본명은 김태연]와 황태성(黃泰成)[이명은 황대용] 등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 김천 지방의 사회주의 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1920년대 초반 계몽주의적 성격의 청년 단체들은 1923~1924년을 거치면서 소위 ‘신진 청년(新進靑年)’들에 의해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김천 지방에서도 선진적인 사상을 흡수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회 조직을 개조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변천]

1. 1920년대

3·1 운동 이후 김천 지방도 청년회·구락부 형태의 청년 단체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었다. 금릉청년회는 1921년 8월 29일 고덕환(高德煥)·황찬주(黃贊周)·이정득(李正得)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으며, 주도층들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지방 유지, 청년 지식층들이었다. 그러나 1923년 3월 전조선 청년당 대회를 계기로 경상북도 지방의 청년회들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금릉청년회의 경우도 임시 총회에서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이후 금릉청년회의 조직 형태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인 사회주의적 조직 체계로 변화되었다. 1925년 4월 중앙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후 김천 지방에서도 사회주의 성향의 사회단체와 사상 단체들이 속속 창립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독서구락부와 김천형평청년회이다.

1927년 들어 청년 단체들은 기존의 무산 계급 청년 운동에서 전 민족적 청년 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김천청년동맹은 1927년 6월 26일에 창립되었고, 군(郡)에는 청년 동맹을 그리고 면(面)에는 동맹 지회를 발회시켜 나갔다. 김천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청년 단체인 금릉청년회는 김천청년동맹 김천지회가 되었으며, 1927년 8월 초에 김천청년회가 김천청년동맹 금릉지회로 조직되었다. 농소면남면에서도 1927년 9월 24일에 김천청년동맹 농남지회가 창립되었다. 증산면의 증산청년회는 1927년 9월 25일에 김천청년동맹 증산지회로 변경되었다.

이후 경상북도 지방에서 1928년 1월 8일 경북청년연맹이 창립되었을 때 김천 청년 운동의 중심인물이 대거 참여하여 집행 위원장에 홍보용, 집행 위원에 황태성이 선출되었다. 이 같은 운동계의 변화는 1927년 4월 김천 지역의 9개의 사회단체들이 연합으로 신간회 지회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경상북도 지방 최초로 신간회 김천지회를 설립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2. 1930년대

1928년 12월 테제 이후 김천의 활동가들은 ‘볼세비키적 전위당’의 건설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에 입각한 운동론을 받아들여 지역 단위의 정치 기구 건설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김천 지방에서도 당 재건 운동의 일환으로 1931년 2월 21일에 김천그룹이 조직되었다. 김천그룹은 부산방직 파업 사건에 관계한 임종업이 출옥한 이후, 그가 주도가 되어 김천 지역의 청년 활동가인 김창식(金昌湜)·나정운(羅鼎雲)·백락도(白樂道) 등과 함께 조직한 것이다.

임종업 등은 12월 테제의 운동 방침에 따라 지역에서 김천그룹을 조직하여 이것을 지도 기관으로, 적색청년동맹,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할 운동 방침을 수립하였다. 김천그룹의 조직은 임종업이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청년 동맹원이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소년회의 회원들은 주로 독서회 또는 학원에서 의식화 운동을 담당하였다.

김천그룹이 결성된 이후 김천 지역에서의 대중 운동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의식화 운동도 함께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제 경찰 당국에서도 1932년 2월부터 운동을 주도하던 청년동맹과 소년회에 대한 수사를 전개하게 되었다. 1932년 3월 청년동맹 간부 김창식·나정운·백낙도 등 세 사람이 검거되었고, 이어 전 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장백이 검거되었다. 잇따라 김천그룹 조직의 주체인 임종업·정동필(鄭東弼) 두 사람이 1932년 4월에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검거된 김천그룹임종업, 김창식, 나정운, 백낙도는 1933년 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각각 징역 2년형을 받았다.

김천그룹원들이 검거된 이후 1932년 9월 김천에서는 1920년대 중앙의 조선공산당 운동과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황태성이 출옥하였다. 김천그룹의 검거로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되자 황태성은 1933년 4월 김천그룹의 관계자들인 백낙도·나정운의 출옥을 계기로 후속 조직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병일·백낙도·나정운 등은 1933년 4월 상순 경 김천그룹 사건의 뒤를 이어 비밀 결사인 김천그룹재건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김천그룹재건협의회는 노동자·농민·청소년·여성·학생을 획득하여 혁명적 노동조합·혁명적 농민조합·반제 동맹을 조직 편성하고, 그 연락 통일을 도모할 공산청년회·조선공산당을 조직할 운동 방침을 수립하였다. 간부로는 백낙도가 총책임 및 농민부를, 이병일이 운수 노동 및 학생부를, 나정운이 일반 노동·청소년 및 여성부를 담당하기로 하고 각각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서는 공산주의 이론 연구 및 교양 활동, 농민 운동, 학원·학생 획득 운동, 소비조합 탈취 운동, 은행·회사·관공서 고용인의 의식화 운동, 공장 노동자의 조직 활동, 반제·반전 운동, 운수 노동자의 조직 활동, 기념일 투쟁, 각종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 등을 주요 활동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서는 지역 단위 정치 기구로 완결하여 중앙의 당 재건 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고립성·분산성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천그룹재건협의회가 1935년 4월 30일 김천소비조합의 주도권을 갖게 되자 곧바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관계자 300여 명이 체포됨으로써 조직은 와해되었다.

3. 해방 이후

1945년 해방이 되자, 김천 지방의 사회주의자들도 해방과 동시에 전국의 각 형무소나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석방되었다. 1945년 8월 16일 대구에서 ‘출옥 애국자 환영회’가 개최되었으며, 이들은 급속히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전국적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있을 무렵, 김천 지방에서도 8월 18일 김천극장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부를 조직한 후 위원장은 김천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인 정열모(鄭烈模)가, 부위원장은 민족주의 계열인 심문(沈文)과 사회주의 계열인 임종업이 맡았다. 그리고 각 부의 간부들로는 총무부장에 홍정태, 재무부장에 안충기, 치안부장에 김한수 등 좌우 성향의 인물들이 골고루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김천그룹에서 활동하던 임종업을 비롯한 홍정태·김한수·나정운·조경환·김인수 등이 치안부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부는 8월 20일 장날에 1만 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해방을 경축하는 시민 대회를 개최하고, 전체 주민의 지지 속에 공식적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김천 지방의 사회주의자들은 1945년 11월 중순경 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각종 대중 단체를 결성하면서 좌익 진영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보수적 우익 인사들은 좌우익 연합으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이탈하였으며,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은 임종업이, 농민부장은 나정운이, 노동부장은 김인수 등이 맡았다. 황태성은 해방된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대구 지역 항일 운동자들과 더불어 김관제가 운영하는 복양당한의원에 모여 경상북도 지방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0월 25일 경상북도 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천 지방의 사회주의 운동의 성격]

일제 강점기 김천 지방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성격은 첫째로, 김천에서는 파벌 타파에 많은 지역의 운동가들이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김천 지방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의 적극적인 협동 전선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로, 김천 지방 사회주의 운동은 지역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면한 생활 문제에 대처하였으며, 이를 통해 현실 대중 조직들을 혁명적 계급 운동에 참여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넷째로, 1930년대 전개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도 실제 존재하는 일반 대중 조직을 자신의 조직 체계 내로 끌어들여 혁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로, 김천 지역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성격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천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운동의 목표를 기본적으로 계급 운동, 혁명 운동에 두고 있었지만, 민족적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30년대 당 재건 운동과 혁명적 대중 운동을 전개하면서 미조직 대중을 광범위하게 조직화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하 김천 지방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한 주체들이 해방 후 변혁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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