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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이 도둑봉으로 불린 사연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203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기동

[역모지군(逆謀之郡)으로 불린 동부리]

동부리는 삼한 시대 김천 지역에 자리 잡은 소국인 감문국의 도읍지가 된 이래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 말까지 개령군과 현의 읍치로서 김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큰 마을 중 하나이다.

그런데 동부리가 그러한 영광 못지않게 역대 중앙 정부로부터 곱지 않은 시각과 경계, 나아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신라의 정복 전쟁에 대한 감문국의 격렬한 저항에서 시작된 중앙 정부와의 대립은 결정적으로 조선 후기에 일어난 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는데, “개령 동부동에서 바라본 금오산은 도적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속설에서 당시 개령을 바라보는 타 지역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소덕유와 길운절의 만남]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 4월 개령현 동부리 관아 입구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가뜩이나 이임을 수일 앞두고 있던 터라 마음이 심란하던 현감 김윤명(金允明)이 마뜩찮은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는데, 장정 수십 명을 대동한 웬 승려가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명을 받고 개령 땅까지 왔거늘 우째 현감이란 자가 마중도 안 나온다는 말이오.”

어명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현감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 생면부지의 승려를 극진하게 안으로 모셔 들였다. 그는 금오산성 수축별감으로 온 소덕유(蘇德裕)였다.

소덕유는 1589년(선조 22)에 있었던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모자 정여립의 처남으로 연좌에 몰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산으로 도망가 중이 된 후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자로, 나라에서 죄를 감해 주고 금오산성 수축별감이라는 임시직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금오산성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인 개령 땅에 들어왔던 소덕유는 이때부터 수시로 어명을 들먹이며 풍파를 일으켰다. 소덕유는 관아에서 제공한 동부리 마을 내의 객사에 머물며 금오산성 수축 공사를 감독한다며 전횡을 일삼았는데, 이때 친분을 쌓은 이가 길운절(吉雲節)이다.

길운절개령현 아포읍 제석리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심성이 좋지 못하여 마을에서 쫓겨나 선산으로 이주한 자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어릴 때부터 흉패하고 다른 뜻을 품었으며 매사에 지략으로써 임하고 그 아비가 관료에 있다가 서울에서 죽어도 고향에 장례 지내지 않고 근왕을 핑계로 어미를 버리고 돌보지 않았다.[少兇悖陰懷異志 每以智略 自負 辰之後 其父晦從仕 死於京城 亦不 葬 丁酉之難 托稱勤王 棄母不顧]”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좌제로 출셋길이 막힌 소덕유와 마을에서 쫓겨나 원한이 쌓인 길운절은 이때부터 서로 의기투합하여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역모를 꾸몄던 것이다.

소덕유는 지난날 매형인 정여립의 거사가 실패한 원인은 거사 장소가 사방으로 통하는 호남 지방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절해고도인 제주에서 난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소덕유는 먼저 제주도에 건너가, 제주목사 성윤문이 크게 인심을 잃은 것으로 보고 문충기·홍교원·김정걸·김대정·김종·이지 등의 공모자를 규합한 후 길운절을 불러들였고, 길운절은 조카 최구익도 함께 제주도로 들어갔다.

1600년(선조 33) 6월 4일 소덕유와 길운절문충기 등과 모의 끝에 6월 6일을 기하여 거병하여 제주목사와 서울에서 온 관리를 모두 없애고, 군마와 군량미를 징발하고 제주도를 장악한 다음 육지에 건너가 서울로 진격한다고 결정했다. 이날의 회합 장소가 어느 술집이었는데, 구생(具生)이란 기생이 이를 엿듣고 길운절에게 “목사 살해가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그 즈음 길운절은 난이 요행히 성공하더라도 병권을 쥔 문충기 등에게로 공로가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고변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길운절은 제주도에 올 때 미리 고변문을 작성하여 몸에 지니고 갔을 만큼 역모사건에 거사의 주모자이자 고변자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다.

제주목사는 길운절의 고변에 접하고 성문을 잠근 후 18명의 연루자를 일망타진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육지의 공모자도 잡아 압송했다. 이들 역모자 20여 명은 4년 2개월 동안 의금부에 구금되어, 왕의 친국을 비롯해 추국청의 심문 끝에 모두 자백을 했다.

길운절의 경우 고변의 공이 있어 몇 달을 두고 어전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선조가 “고변자를 죽음으로 다스린다면 변이 있을 때 누가 감히 그 변을 고할 것이며, 벌하지 않으려니 통분이 막심하고 극히 난처하다.” 할 정도로 길운절의 신변에 관한 처리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신하들도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1601년(선조 34) 8월 3일, 길운절은 비롯한 모든 죄인을 능지처참, 전시 사방, 적몰 가산, 준법 연좌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길운절은 고변의 공을 인정하여 연좌 적몰은 면해 주었다.

[복현(復縣)의 열망]

1601년 8월, 모든 판결이 난 후 개령현은 역도 길운절의 출신지라 하여 폐현된 후 김산군에 합쳐졌다.

아포읍 제석리 길운절이 태어난 집은 헐어서 못을 팠는데, 제석리에 남아 있는 길지(吉池)가 바로 그때에 판 못이다. 또 이언룡, 이식, 이극, 이여림, 최민수, 이문경 등 많은 개령 출신 유생들이 길운절의 거짓 호명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때부터 개령은 역모를 일으킨 군이라는 불명예를 안았으며, 현민들은 갖은 수모와 불이익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예부터 길상지지로 일컬어지며 큰 인물을 배출하는 영험함을 지닌 곳으로 전하는 금오산개령 동부리에서만은 뿔이 달린 도적의 형상으로 보인다 하여 도적봉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일화는 개령에서 나라를 훔치려는 큰 도둑, 즉 길운절이 나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개령 현민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을 것이다.

그 후 경상감영에서 내사를 통해 개령 유생들의 무고함이 판명되고, 지역 유림들의 끈질긴 복현 상소 끝에 개령현은 폐현된 지 8년이 지난 1609년(광해군 1) 마침내 복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해로 무너진 후 방치되어 있던 개령향교는 현감 이창거 등이 주동이 되어 경관이 수려한 유동산 아래 감천 변에 새로 중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역모지군(逆謀之郡)으로 몰려 참담함에 신음하던 지역 유림들이 일신을 면모하고 흥학을 이루고자 하는 개령 복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보제공]

  • •  이근구(남, 1921년생, 김천시 양금동 주민,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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