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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20302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집필자 송기동

[영남만인소를 주도하다]

“일본은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준헌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1881년(고종 18)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 주재 청나라 참사관인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입수하여 고종에게 바치고 개혁을 주창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김홍집을 탄핵하고, 개화에 반대하는 연명 상소인 만인소를 올렸다. 이때 영남 지역에서는 개령향교가 중심이 되어 만인소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개령향교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사자사와 개령향교의 동거]

이처럼 역사의 주요한 고비 때마다 지역 여론을 대변하며 향풍(鄕風)을 이끌어 온 개령향교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는 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개령향교는 처음 조선 전기 개령 현청 소재지의 서쪽에 위치한 서부리 웅현 고갯마루에 자리한 사자사(獅子寺)라는 절에 ‘개령향교’라는 현판만 달아 임시 향교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세태 속에서 화급히 향교를 건립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지역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부득이 인근의 절을 폐하고 임시 향교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473년(성종 4)에 이르러 개령현감 정난원이 관아 북쪽에 새로이 향교를 세우면서 사자사에서의 더부살이 시대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사자사를 허물 때 나온 목재와 석재들이 너무 훌륭하여 대부분을 새 향교 건립에 그대로 재사용했다고 하니, 어찌 보면 완전한 독립은 아닌 셈이다. 사자사 터에는 옛날의 구구한 사연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지금도 삼층석탑이 동부리를 향해 우뚝 서 있다.

[개령향교의 시련]

이후 1522년(고종 18)과 1563년(명종 18)에 현감 태두남과 윤희주가 중창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1600년(선조 33) 개령현 소속인 아포 출신 길운절(吉雲節)이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됨으로써 1601년(선조 34) 개령현이 폐현되고 개령 출신 유생들의 출사길이 막히는 등 이때에 이르러 개령은 최고의 시련을 맞게 된다.

이 시기의 개령향교는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황폐화되기에 이른다. 한편, 끊임없는 지역 유림들의 복현 상소가 마침내 받아들여져 1609년(광해군 1) 개령은 다시 현으로 복현되었다.

이에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흥학(興學)을 기치로 복현을 기념하는 향교 재건 운동에 들어가, 그 결과물로 1609년 현감 이창거 등이 주동이 되어 경관이 수려한 유동산 아래 감천 변에 향교를 새로 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천과 인접해 여러 차례 물이 범람하여 침수되자 향교 이전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다. 현민들의 오랜 염원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향교 이전은 1866년(고종 3) 현감 이양직이 수침으로부터 안전하고 감문산과 관학산의 중간으로 예부터 명당으로 알려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마련하면서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유 정승의 억울한 누명]

개령향교가 유동산 아래 감천 변에서 감문산으로 이전되기 전에 먼저 관학산 중턱으로 이전했었다는 이야기가 동부리 주민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또한 관학산에 있던 향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된 사연과 관련해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인 유후조(柳厚祚)가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명당 터였던 향교를 억지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는 다분히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명재상의 한 분이자 명문가로 불리는 풍산유씨 유성룡의 후손으로, 한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청백리 유후조가 유학의 지방 본산인 향교를 사익을 위해 함부로 이건시켰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1989년 개령향교 대성전을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에 1866년에 지금의 위치로 향교를 옮겼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도 유후조의 사망 연도인 1876년과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자사 절집에 간판만을 향교로 교체하면서 시작된 개령향교의 역사는 수차례에 걸친 이전과 수침의 운명을 거쳐 마침내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아 개항기 영남만인소 운동을 주도하며 전국적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터를 빼앗겼다는 불명예를 받는 등 그 부침의 역사가 순탄치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모진 풍상에도 근엄한 자태를 머금은 채 개령벌을 지켜보는 외양이 더욱 굳세 보인다.

[정보제공]

  • •  강상철(남, 1927년생, 개령면 동부리 주민, 개령향교 전교)
  • •  김석암(남, 1931년생, 개령면 서부리 주민, 개령향교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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