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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박사 김용이 이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30202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1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참외박사로 통하다]

“이장, 이장, 우리 밭에 좀 가보세. 참외 순이 꼬구라 들어[말려들어].”

동부1리 김용이[1962년생] 이장 집이 아침 댓바람부터 소란스럽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수시로 벌어지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동부리 참외박사로 통하는 김 이장은 집에 초상이 나도 해뜨기 전에 참외하우스 문을 열어야 한다는 철칙을 또 잊었다. 남의 참외밭 살펴 주러 갔다가 정작 자신의 참외밭 문을 일찍 열지 못해 여러 차례 낭패를 본 일이 있어 부인 김진미[1964년생] 씨한테 단단히 찍힌 지 오래지만 괘념치 않은 눈치다.

[귀농을 결심하고]

“부모님이 아들 넷을 두셨는데 아무도 농사를 짓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부지, 어무이도 원하지 않으셨고. 더군다나 지는 막내였기 때문에 농사는 생각도 안 했었는데, 이것도 천직인지 뭔지 이상하게 직장 생활 하는 것도 지겹더라고요.”

개령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김용이 씨는, 김천농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시 제일합섬에 근무하다 12년 전인 1997년에 귀농을 했다.

다람쥐 같은 일상이 질리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고 있는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 못내 죄스러웠기 때문이란다.

“고향으로 농사지으러 가자고 했더니 집사람이 뜻밖에 반대를 안 해요. 부모님도 순순히 그렇게 하라 하시고. 오히려 집사람이 반대를 안 하니까 더 미안하고, 처음에는 내심 불안하기까지 하더라고요.”

5년 전 아버지가 작고해서 김용이 씨는 현재 어머니만 모시고 있다. 동부1리에서 가장 젊은 농부 김용이 이장은 1988년 부인 김진미 씨와 결혼해 대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을 두었는데, 현재 개령면 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해야 할 일도 많다.

“농사밖에 몰랐었는데 농민 단체 일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제일 큰 문제가 일할 사람이 없다는 깁니다. 우리 마을에도 70% 이상이 노인이라요.”

[참외로 부농의 대열에]

김용이 이장은 물려받은 전답을 바탕으로 지난 12년간의 노력 끝에 참외 5950.41㎡[1800평], 벼 8595.04㎡[2600평]으로 경작 규모를 늘려 이제는 어엿한 중견 부농의 대열에 합류했다. 소득도 참외에서만 1년에 4천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린다.

“우리 마을은 개령들이라는 비옥한 들이 있어 옛날부터 벼농사만 지어 왔고, 당연히 논에는 나락만 심는 줄 알았어요. 저도 그랬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귀향해 현실을 보니까 그래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김용이 이장은 인근 감문면에서 참외 농사로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보고 독학하다시피 해서 기술을 익혔다. 동부리에 참외 재배를 전파한 것도 당연이 젊은 농부 김용이 이장의 몫이었다. 참외가 수입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금은 마을 앞 개령들에 참외하우스가 적잖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김용이 이장은, 동부리 참외에 대한 초창기부터의 열정이 있었기에 누구라도 자신에게 참외에 대한 기술 자문을 구하면 마다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한다.

“올해는 이상 저온이 심해서 참외가 자라지를 않아요. 12년간 참외 농사를 지었지만 이렇게 추운 봄은 또 처음 겪네요. 자들도[참외] 꼭 사람 같아요. 얼라[어린아이] 키우듯이 말이지 너무 추워도 안 되고 너무 더워도 안 되고.”

오늘도 참외박사는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자신의 열정으로 올 봄의 기온을 후끈 올리기라도 하듯이.

[정보제공]

  • •  김용이(남, 1963년생, 개령면 동부1리 주민, 동부1리 이장, 개령면 농업경연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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