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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201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경호

[금비녀가 떨어진 자리]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명당(明堂)에 조상과 부모의 묘를 써서 집안과 자손의 번영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김천군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뒷산에 자리한 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의 묘소는 오래전부터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라고 전해져 오는 곳이다. 실제로 많은 풍수가들이 ‘금재낙지지처(金釵落地之處)’, 즉 금비녀가 떨어진 자리라고 평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스님이 잡아 준 명당]

연성부원군의 다섯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숙황(李淑璜)[문과 급제, 성균관직강], 이숙형(李淑珩)[문과 급제, 현감], 이숙규(李淑珪)[문과 급제, 감찰], 이숙기(李淑琪)[무과 급제, 연안군(延安君)], 이숙함(李淑瑊)[문과 급제, 이조참판]이 그들이다. 또한 그 후손 중에 수많은 명경(名卿)과 석덕(碩德)이 나왔다. 그런데 이처럼 연성부원군의 후손들이 높은 관직에 진출하고 성한 것은 모두 명당에 연성부원군의 묏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1446년(세종 8), 연성부원군의 배위 곡산한씨(谷山韓氏)가 작고했을 때의 일이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던 어느 날, 상주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명당을 잡아 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상주가 슬피 곡을 하고 있는데 노비가 들어와서, “명당을 코앞에 두고 울기는 왜 울어.” 하고 지나가는 스님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상주는 간밤의 꿈이 생각나서 필시 무슨 곡절이 있구나 생각하고 버선발로 급히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스님을 잡고 묏자리를 잡아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스님은 상주를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 버렸다.

하지만 상주는 포기하지 않고 스님을 따라 지례(知禮)와 대덕(大德)을 지나 거창의 경계인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렀다. 상주는 고갯마루에 앉아서 쉬고 있는 스님에게 다가가 또다시 간절하게 묏자리를 잡아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상주의 효성에 감복하여 가던 길을 되돌아 상주를 따라와서 잡아 준 것이 지금 연성부원군이 묻혀 있는 묏자리라고 한다.

스님은 묏자리를 잡아 주면서 “이곳을 파면 반드시 석함(石函)이 나올 것인데, 그 안에는 기이하게 생긴 물건이 들어 있을 테니 절대로 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 곳의 땅을 5자 정도 파 들어가자 스님의 말대로 석함이 하나 나왔다. 그런데 땅을 파는 인부가 스님의 당부 말을 깜빡 잊고 그만 석함을 열자, 석함 속에서 벌 두 마리가 날아가 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님이 깜짝 놀라며, “이런,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하지만 상주는 걱정하지 마시오. 3년 이내에 큰 발복(發福)이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과연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 넷째 아들 이숙기와 다섯째 아들 이숙함이 진사과와 생원과에 각각 급제했고, 이어서 다른 아들들이 무과와 문과, 중시 등에 연달아 급제하였다. 스님이 말한 날아간 벌 두 마리와 우려했던 일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후손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는데, 근래에 와서 『품천사집(品川史集)』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연성부원군의 묘소는 통상의 관례를 깨고 가장 아래에 위치한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부인 곡산한씨의 묘소를 뒤로 들여 무덤을 상하로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정보제공]

  • •  이순영(남, 1926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송기동(남, 1968년생,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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