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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202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조선/조선,현대/현대
집필자 최경호

[최씨담과 화순최씨 정려]

원터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방초정(芳草亭)이다.

또한 방초정 바로 앞에는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리는 못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이정복 처 화순최씨 정려각’이 자리하고 있다.

화순최씨는 방초정공(芳草亭公) 이정복(李廷馥)의 부인으로, 원터마을에는 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화순최씨는 관찰사를 지낸 최율의 딸로, 당시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반촌인 화로마을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화순최씨가 17세 때 결혼식을 올린 뒤 아직 신행(新行)도 가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후 온 고을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왜적이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자, 최씨는 죽어도 시가에 가서 죽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몸종 ‘석이’에게 짐을 지우고, 어머니 등 가족 몇 사람과 함께 친정인 금산현의 하로마을에서 이곳 지례현 원터[院基]마을로 찾아왔다.

그런데 화순최씨가 시가에 도착해 보니 시가 식구들은 이미 피란을 떠나고 없었다. 수소문을 하니, 시가 식구들이 피란을 떠난 곳은 능지동(陵旨洞) 서림곡(西林谷)이라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그곳을 향해 길을 찾아 나서는 중에 왜구가 나타나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모두 당황해 하자 최씨는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바르게 죽은 것이 낫다[苟活不如政死]”라고 말하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가까이 있는 못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이를 지켜 본 몸종 석이 또한 같이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최씨와 노비 석이의 이야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 전해졌고,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이 빠져 죽은 못을 최씨담이라 불렀다. 그리고 1632년(인조 10) 최씨의 기개와 정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가 내려져 정려각을 세우게 되었는데, 인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는 정려각의 현판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최씨 부인의 고결한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정려각 현판에는 ‘절부부호군이정복처증숙부인화순최씨지려(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한 정려각 앞에는 당시 화순최씨를 모시던 몸종 석이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최씨담에 파묻혀 있던 것으로, 1975년 새마을 운동 당시 못을 파내는 과정에서 발견하여 화순최씨의 정려각 옆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최씨의 정절과 여노비의 충직한 행동]

최씨담에 얽힌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원터마을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최씨담은 최씨의 정절과 더불어 주인에 대한 여노비의 충직한 행동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는 셈이다.

이 두 여성의 이야기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각각 남편과 주인에 대한 정절과 충성, 그리고 신뢰를 이야기하고 있다. 슬프지만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노비에 대한 충절비를 세워 줄 수 없었지만, 석이의 비가 세워진 배경을 마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양반가에서 노비를 위한 비를 만들 수는 없었지요. 주인을 따라 죽은 몸종 석이의 충성이야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그런데 누군가가 주인을 따라 죽은 충노 석이를 기리기 위해 몰래 비석을 만들어서 최씨와 노비 석이가 빠져 죽은 웅덩이에 던져 줬다고 해요.”

[정보제공]

  • •  이철응(남, 1945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연안이씨 종손)
  • •  이응수(남, 1961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현 원터마을 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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