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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내 고향에서 죽어야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302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다희

[마을 내 몇 안 되는 비녀 꽂은 할머니]

“칼로 썰면 떡이 안 떨어진다. 접시 없나. 접시 갖고 와서 썰어야 할 텐데.”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연안이씨 종택에서 종부를 도와 불천위 제사 준비를 하고 있던 권진순[1923년생] 씨의 모습이 보였다.

“집안일인데 도와주며 해야지. 아니면 이 많은 일을 혼자서 어떻게 해.”

얼핏 연세가 많아 보이는데도 권진순 씨는 젊은 종손며느리 못지않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밭일로 다들 들에 나가고 없는 마을회관에서 거울을 보며 비녀를 꽂고 있는 권진순 씨의 모습이 보였다.

“쪽을 찌니깐 참말로 옛날 사람 같제. 허허. 이 마을 사람들 모두 파마하고 그러는데 나는 두상이 크고 안 된다 캐서. 쪽 안 하면 보기 싫어서 안 된다 그래 가지고 이거 하고 있지. 여기 쪽찐 사람 네 명 정도밖에 안 돼.”

비녀를 꽂은 모습이 옛날 사람 같아 보인다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할머니의 얼굴 뒤로 은비녀가 반짝였다.

[죽어도 내 고향에서 죽어야 해]

권진순 씨의 남편 고향은 원래 원터마을이었다. 과거에는 마을 내에서도 잘살았던 집이었으나 시아버지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서 가지고 있던 땅을 다 팔게 되었고, 권진순 씨가 시집을 오자마자 지례의 산골짜기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골짜기로 그래 들어갔는기, 화전이라도 해야 빗겨먹고 산다고 그래서 들어가서 살았지. 오래 살았어. 참말로.”

한 마을에 두 집밖에 없는 골짜기에서 살림을 살기란 그리 녹록치 않은 삶이었다.

“거기서 살다가 바깥어른이 그러대. 애들 가르치고 결혼시킬라면 나가야 한다고. 골짝에 있으면 밥 못 먹는다고. 그래 바깥어른이 굳이 원터마을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하는기라. 여기 와서 고생을 또 했잖아. 여기 와도 마을 사람 모두가 곤란이고. 그래도 그 골짜기에서 하루 종일 일해도 품삯을 100원밖에 안 주는데 여기는 300원을 주더라고. 300원 하면 딴 건 못해도 먹고살 수는 있다고 그래. 아무것도 없이 이곳에 다시 온 거라.”

그렇게 권진순 씨는 17세에 결혼하자마자 떠난 원터마을을 2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또다시 새로 시작해야 하는 터전에서 푸념도 많았지만 바깥어른의 소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것도 없지. 한 마지기 반의 논을 사고 집 한 칸도 사 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했지. 그래도 어쩌겠어. 바깥어른이 고향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데. 죽기 전에 고향을 들어와서 살아야겠다는데…….”

권진순 씨는 말을 하면서 굳은살 박인 손으로 역시 굳은살 박인 발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손과 발이 고생스러웠을 그녀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같이 고생을 했는데 이제 편안하려 하니 또 영감이 돌아가시고. 이 좋은 세월을 함께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지.”

[함께할 수 있는 기쁨]

결혼을 하자마자 일찍 마을을 떠났던 탓에 권진순 씨는 불천위와 향사, 묘사 등 마을 내 행사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이 혼자 아등바등 사니깐 여는 못 돌아보고 오지도 못했어요. 이사를 오니깐 이제 알고 자꾸 도우려 하는 거지.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날짜도 잘 기억하지 못해요.”

젊은 시절 함께하지 못한 세월을 갚는다는 생각에 마을 내 행사는 빠지지 않으려 한다는 권진순 할머니의 말이다.

“바깥어른 고향이 곧 내 고향이지. 편해요 지금은. 이렇게 함께 돕는 낙으로 사는 거지 뭐.”

[정보제공]

  • •  권진순(여, 1923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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