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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他姓)으로 원터마을 살기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30203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다희

[친절했던 원터마을 주민]

조사자가 원터마을로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이 최계환[1944년생] 씨다. 원터마을로 들어서면 나오는 첫 번째 집이 최계환 씨가 사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최계환 씨는 낯선 이의 방문에도 마치 본인의 집을 찾아온 손님처럼 편안한 미소로 대해 주었다. 아마도 마을 내 누구의 손녀라도 될까 물었던 모양이다. 1987년부터 6년간 마을 이장 직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바깥사람들을 대할 때의 친절함이 생활에 배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간략하게 마을에 온 이유를 설명하니 “그럼 구경하세요.” 하고는 경운기를 타고 나갈 채비를 한다. 복숭아 재배 때문에 밭에 나가야 한단다. 느린 말씨와 선한 웃음이 그 어느 공직자보다 청렴하고 강직해 보였다.

일하러 가는 것을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어, 필자는 다음에 다시 마을을 들어올 때 한 번 들르겠노라 약속하고 간략하게 얘기를 마쳤다.

[타성(他姓)으로 원터마을에서 살기]

그에게 성함을 묻고는 최씨라는 대답에 짐짓 놀랐다. 연안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타성(他姓)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을 거란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에요. 타가(他家) 물을 먹어야 자손을 본다라는 말을요. 그래서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거예요.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땅이 있나요, 뭐가 있나요. 없는 형편에 힘들게 살기 시작했죠.”

최계환 씨는 어린 시절이 많이 외로웠다고 회고했다.

“타성이라서 설움 주고 그런 건 없었는데, 그저 외로웠죠. 그거 외엔 없었어요. 또 내가 초등학교 다니면서 서당도 다녀서 『명심보감』·『소학』 등을 배우다 보니 도덕성이랄까, 양보하면서 사는 삶을 배우기도 했고. 내가 바르면 남들도 나에게 그렇게 대해 줬었구요.”

집성촌에서 타성으로 살기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어려운 점도 없었다고 최계환 씨는 말한다. 아무것도 없이 정착한 마을에서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라고.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던 젊은 시절]

3남매 중 막내로, 누나는 일찍 결혼하여 출가를 했고 형은 결혼 후 군대를 갔으니 부모님을 모실 사람은 최계환 씨밖에 없었다. 당시 최계환 씨는, 이 마을에서 60세가 넘은 나이에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는 어른은 아무도 없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늘 지게를 지고 다닐까라는 생각에 속상했다고 말한다.

“학교를 마치고 와서 아버지 보는 앞에서 지게를 부쉈어요. 내가 일을 다 하겠다고. 그러니 아버지는 더 이상 지게를 메지 말라고.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죠.”

그렇게 최계환 씨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밭일은 모두 도맡아서 이골이 나도록 하다가, 농사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17세 때, 아무것도 없이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와서 남의집살이를 했다. 그러면서 못했던 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일도 해 보았다.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 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후 서울에 도착한 전보에 ‘형 사망 속내[형이 돌아가셨으니 빨리 귀가하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에 울면서 고향에 내려왔는데, 형이 웃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핏줄이라곤 우리 둘이다. 나라가 이토록 시끄러운데 이럴 때일수록 같이 살아야 되지 않겠니.”

그렇게 도망치듯 벗어났던 마을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 것은 하나밖에 없는 형이었다.

[4000평 복숭아 밭]

고향으로 내려온 최계환 씨는 농사만 짓진 않았다. 농사일은 거의 아내가 도맡아 했고 그는 금릉군 마을금고지회에서 지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79년 대구에서 실내화 공장을 운영하다가 거창 북부농업협동조합에서 6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구성초등학교에 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그 맞은편에 문방구 겸 작은 가게도 운영했다.

그러다가 36세 되던 해 최계환 씨는 보증을 잘못 서서 땅과 가게 등 그동안 이뤄 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남의집살이를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쩌겠어요. 이미 저질러진 일인걸. 남의 탓만 하고 그렇게 살 순 없잖아요. 다시 시작했죠 뭐.”

원터마을에서 타성으로 살기에 서운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6년간 이장 직도 맡아서 했다.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마을 주민으로서. 그래 이장 직을 처음 시작하고, 잘하다 보니 6년이나 한 거 아니겠습니까. 마을에 봉사를 했죠.”

지금은 마을에서 4000평[1만 3223.14㎡] 밭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았다. 복숭아나무를 심기 위해 인터넷도 찾아보고 교육도 받으러 다녔다.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

“씨앗 뿌리고 심기만 한다 해서 복숭아가 나오나요. 복숭아가 알맹이만 크다 해서 좋은 복숭아가 아니거든. 당도도 높이고 색깔도 좋게 해야 한단 말이에요.”

어릴 적 아무것도 없이 자란 최계환 씨는 지금 4000평 복숭아밭의 임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수성가(自手成家)’란 말이 떠오른다.

“제가 무슨 자수성가인가요. 굴곡이 워낙 많았던 인생인데요. 뭐 그래도 지금은 굉장히 편안합니다. 행복하죠.”

[정보제공]

  • •  최계환(남, 1944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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