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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C0301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재민

[마을 어린이들이 부부의 연(緣)을 맺다]

한평생을 해인리 해인동에서 믿음과 사랑을 쌓아 가는 부부가 있다. 바로 마을 토박이로 본 조사에 많은 도움을 준 김석우[1933년생]·김복수[1936년생] 부부이다.

김석우 씨는 해인리 해인동 출신으로 한평생을 해인리에서 살았다. 그의 아내 김복수 씨는 광산김씨로, 다섯 살 때 마을로 들어와 지금까지 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이 부부의 첫 만남은 유년 시절[1930년대 후반]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들 시집, 장가 갈 때만 하더라도, 한 마실[마을]에서 커도 말 한 마디 못해 봤다 칸게. 말하면 난리 나요. 그래서 말 한 마디 못해 보고 시집가고 그랬다 칸게. 지금은 연애 그러니 어쩌니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어. 여름에 놀 때도 만나 가지고 말 한 마디 못한다 칸게.”

1953년 양가 부모님의 결정으로 김석우·김복수 씨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어른들이 [얘기]하면 무조건 결혼을 해야 했어……. [중략] 그땐 세월이 그랬었다 칸게.”

1년 후, 김석우 씨는 달콤했던 신혼 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다시 마을로 돌아와 감자와 고추 등의 작물을 재배하면서 생업을 유지하였다.

[서로가 있기에 든든했던 한편생]

김석우 씨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약 3년여에 걸쳐 손수 집을 짓게 되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항상 옆에서 내조하는 아내가 있어서 힘들지 않았다고 김석우 씨는 말한다.

“그땐 이 사람한테는 많이 미안했지. 그래도 이 사람이 항상 힘이 되더라고, 이 사람 아니면 집도 못 지었을 거야…….”

현재 김석우 씨는 1남 5녀를 둔 딸부잣집의 가장이다. 6남매 중 둘째로 아들을 보았지만, 그 이후 내리 딸 네 명을 낳았다. 한 명의 아들이 아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부인 김복수 씨가 대신 대답한다.

“어언지요[아니에요]. 제가 딸 낳을 때마다 이 사람[김석우 씨] 뭐라 캤는지 알아요? ‘딸을 낳아도 내 자식이 최고다. 남의 아들 대통령이면 뭐하노. 내 자식이 제일이고, 닭도 천 마리 먹이면 봉황이 된단다. 딸 많이 놔도 내 자식이 제일인 게 나는 그런 거 관계 안 한다[신경 안 쓴다]’ 이카는[라고 말하는] 양반이야, 저 양반이.”

[한평생을 해인리에서 살다]

김석우 씨의 유년 시절 마을은 놀이의 터전이었으며, 청년 시절 이후 마을은 생업의 터전이었다. 한창 고추·감자 등의 작물을 재배하던 1984년경, 김석우 씨는 해인동 아랫마을인 윗두대에서 ‘오미자’를 처음으로 들여와 해인동에서도 오미자가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해인동에 귀농하는 다른 젊은 농사꾼들도 오미자 재배에 힘을 써 많은 수익을 내고 있다.

김석우 씨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2년여에 걸친 해인동 도로 확포장 공사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에도 항상 앞장서 왔다.

2005년에는 노인회가 설립되는 데도 힘을 써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1대 노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때 아무도 안 할라카이[안 하려고 하니] 내가 했제 뭐. 딴기[다른 방법이] 있나.”

2009년에는 웃뜸 길을 내기 위해 자신의 고추밭까지 헐한 값으로 내놓게 되었지만, 마을을 위한 일이므로 후회는 없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한다.

“마을에 길이 필요하다는데 어쩌겠노. 다 같이 협조해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니깐…….”

이런 정황을 다 아는지라 마을 주민들은 김석우 씨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는다.

“지금 우리 마을 최고 어른입니데이. 연세만 제일 많은 게 아니고, 우리 마실[마을]에서 최고 어른입니데이.”

[정보제공]

  • •  김석우(남, 1933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 •  김복수(여, 1936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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