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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 산신제 제관은 내 몫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C030104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재민

[산신제의 열쇠를 찾다]

해인리에서 마을의 전설을 비롯한 옛이야기와 산신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 줄 만한 분이 계신가 하고 여쭈자, 대부분의 마을 사람이 추천해 준 분이 정인규[1938년생] 씨였다.

“산신제 그거 알라 하믄 그분 찾아가 봐야 될 끼야.”

그리하여 조사자는 정인규 씨 댁을 수소문하여 찾아가, “계세요, 계십니까?” 하고 연신 불러 댔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어 포기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하루의 모든 일정을 소화한 그날 저녁 무렵, 조사자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마을 산책을 하다가 정인규 씨 집에서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대를 품고 정인규 씨의 집을 방문했고, 마침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정인규 씨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니 정인규 씨가 조사자를 환한 미소로 응대해 준다.

[6·25 전쟁을 피해 해인리 골짜기로 들어오다]

1938년 북한에서 태어난 정인규 씨는 6·25 전쟁을 피해 해인리 삼막골로 들어와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국가에서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화전을 일구는 것을 허용했기에, 해인리 골짜기에서도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어 감자와 옥수수, 조 등을 수확하여 생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6년 국가에서 국토의 산림 보존과 북한 간첩들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이로 인해 산골짜기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을 근처의 마을이나 외지로 나가야만 했다.

당시 한 가구당 4만 원의 보상비[당시 5급 공무원의 봉급이 2000원]가 지급되었는데, 이는 해인리 골짜기 주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우리가 골짜기에 살았어. 그때 삼막골에는 여덟 집 정도 됐겠다.

그라고 우리가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실[마을]로 내려오라 해서 돈 4만 원인가 받고 마실로 내려왔지.”

[산신제 제관은 내 몫]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해인리의 산신제는 제관의 역할을 하는 ‘상심’과 제관을 돕는 ‘하심’을 정해 놓고, 상심과 하심만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 정인규 씨 부자가 산신제 제관의 역할을 하는 ‘상심’을 20여 년 넘게 도맡았다고 한다.

“이 마실에 내려와서 산신제는 내하고 내 아부지하고 다 지냈다니껜.”

1966년 마을에 내려온 정인규 씨의 아버지는 마을의 제관을 약 20년 넘게 도맡아서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친이 작고하자 산제당 제관의 역할은 고스란히 정인규 씨에게 돌아왔다.

“어른[선친]하고 했은게[했으니까] 내막도 잘 알고 한다고 무조건 맡겨 주는 거라. 나는 그래도 [제사] 지내도 ……[중략]…… 내가 암만 안 할라 캐도 떠맡기는데 우얄끼라. 아무도 못 한다 카고…….”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산제당은 정인규 씨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2000년 이후 해인리의 산신제는 모든 남성 주민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돌아가면서 유사를 선정하여 제수를 준비하고 제사를 지낸다. 과거처럼 정인규 씨가 혼자 지내지 않지만, 현재 해인리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산골마을에서 산신에게 많은 정성을 드렸던 정인규 부자의 믿음과 노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보제공]

  • •  정인규(남, 1938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참고문헌]
  • 네이버 용어사전(http://terms.naver.com/item.nhn?dirId=1114&docId=7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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