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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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正己 |
이칭/별칭 | 근지(謹之),각회(殼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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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11년 9월 26일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3년 10월 - 묘갈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산북동] |
성격 | 유생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유생.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근지(謹之), 호는 각회(殼晦). 고조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권령(權齡), 증조할아버지는 상주 목사를 지낸 권박(權博), 할아버지는 종묘서 영을 역임한 권덕유(權德裕)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이고, 어머니는 대구 서씨(大邱徐氏)로 참의를 지낸 서고(徐固)의 딸이다. 부인 온양 정씨(溫陽鄭氏)는 정렴(鄭石+廉)의 손녀이고 정지임(鄭之臨)의 딸이다. 아들은 권저(權詝), 권인(權諲), 권지(權訨), 권양(權諹), 권잉(權仍)이고, 딸은 정하응(鄭河應)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도 3남 2녀를 낳았다. 동생은 권득기(權得己)이고 조카는 탄옹(炭翁) 권시(權諰)이다.
[활동 사항]
권정기(權正己)[1552~1611]는 학문을 좋아하여 평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모친상을 당했을 때 몸이 지나치게 야위어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 이를 계기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문의현[지금의 충청북도 청원] 형강(荊江) 가 노산(老山) 아래에 집을 짓고 치휴(恥庥) 정선(鄭瑄)과 더불어 강물을 사이에 두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삼아 도의를 탐구하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근심을 잊었다.
형제나 친척들이 가난함을 염려하여 간혹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면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뜻이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마시오.”라는 말로 물리쳤다.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통달하니 유학에 조예가 깊은 동생 권득기도 그를 높이 받들었다. 1611년(광해군 3) 9월 26일 50세로 세상을 떠나 양주 천전리 남쪽 들에 장사 지냈다.
[묘소]
권정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평화로]에 있다. 1683년(숙종 9) 10월 윤증(尹拯)이 글을 짓고, 이보승(李溥承)이 쓴 묘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