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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199
한자 東部里
영어음역 Dongbu-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3.28㎢
가구수 212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440명(남자 215명, 여자 225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교동(校洞)·옥전동·정변동·구교동(舊校洞)을 통합하면서 개령면사무소 동쪽에 있으므로 동부동(東部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부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교동·옥전동·정변동·구교동이 통합되어 김천시 개령면 동부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개령면 동부동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교동·옥전동·정변동이 동부1동, 구교동이 동부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동부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으로 감천이 흐르고 감천 변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 예부터 김천의 곡창지로 알려져 왔다. 서쪽에 감문산·취적봉(吹笛峰), 남쪽에 호두산, 북쪽에 유동산이 솟아 있다.

[현황]

동부리개령면 소재지로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3.28㎢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12세대에 440명(남자 215명, 여자 2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부1리·동부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다. 삼한 시대 감문국의 도읍지이며 문화 유적으로는 개령향교, 계림사(鷄林寺), 감문국 시대에 조성된 동부연당(東部蓮堂), 향약소인 내신정, 조선 후기 좌의정을 지낸 유후조(柳厚祚)[1798~1875]의 묘 등이 있다.

계림사감문산 자락에 있는 천년 고찰로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418년(눌지왕 2) 창건하였다. 일설에는 계림사가 있는 감문산이 풍수지리상 기운이 너무 세어 감천 건너편 아포읍 대신리에 살상(殺傷)의 기운이 뻗치는지라 그 기운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천 마리나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닭조차 수시로 폐사하는지라 궁여지책으로 절 이름을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뜻의 계림사로 고치어 닭 기르는 것에 대신했다고 한다.

계림사 뒤로는 감문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인 취적봉[300m]이 솟아 있다. 감문국 시대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이곳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변란이 일어났을 때 봉화를 올렸다 하여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

자연 마을로는 교동·옥전동·정변동·구교동 등이 있다. 옥전동은 교동 아래 초등학교 옆에 있는 마을로 옛날 개령현의 옥(獄)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달리 옥거리라고도 한다. 정변동은 옥전동과 구교동 경계에 큰 샘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현재의 개령면사무소와 파출소, 개령초등학교가 들어선 자리는 옛 개령현 관아 터로 개령면사무소 앞에 당시의 연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구교동은 구교(舊校) 또는 교천(校遷)이라고도 한다. 1610년부터 1866년까지 개령향교가 있던 곳이어서 붙인 지명이다. 구교와 구교동은 옛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며 교천은 개령향교가 옮겨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부에서 교천을 조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천의 변음(變音)으로 보이며 특별한 의미는 없는 듯하다. 개령향교 위치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관학산에 있는 유후조의 묘가 있는 자리라고 알고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마을 앞 농경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교동은 관학산을 배후로 양천리와 함께 감문국 시대 궁궐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구교동과 양천리의 경계인 말고개 정상부 육종철의 집에 1969년까지 궁궐 초석이라고 전해 오는 다듬은 돌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대문 앞에 일부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앞 유동산 옆에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1934년에 간행된 향지(鄕誌) 『감문국 개령지(甘文國開寧志)』에 이 못을 동부연당이라 하고 감문국 시대 궁궐에 딸린 연못으로 적고 있다. 구교동의 관학산은 감문산의 취적봉 줄기가 백호와 청룡을 이루며 뻗어 내리다 그 혈맥이 맺힌 천하 명당으로 꼽히는데,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이름난 대부호(大富豪)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중 대표적인 집안이 김해 허씨(金海許氏)와 단양 우씨(丹陽禹氏) 집안이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대법관을 지낸 허진의 생가는 1790년 관학산 자락 약 5,950㎡의 대지에 자리 잡은 대저택으로 안채, 사랑채, 곳간, 행랑채, 문간채로 이루어진 ㅁ자형 가옥이었다. 지금은 정원수 몇 그루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 또 이웃에 자리한 우상학(禹象學)[1864~1942]의 대저택도 이제는 집터만 남아 있다. 단양 우씨·김해 허씨·성산 배씨(星山裵氏)가 집성을 이루었던 마을이었으나 광복 이후 단양 우씨와 김해 허씨는 점차 타지로 떠나고 남아 있지 않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1) 대표적인 집안이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단양 우씨(端陽禹氏) 집안이다 ->대표적인 집안이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단양 우씨(丹陽禹氏) 집안이다 2) 단양 우씨·양천 허씨·성산 배씨(星山輩氏)가 집성을 이루었던 ->단양 우씨·양천 허씨·성산 배씨(星山裵氏)가 집성을 이루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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