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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02
한자 藍田里
영어음역 Namje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남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55㎢
가구수 102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216명(남자 111명, 여자 105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예부터 남밭이라고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고쳐 남전동(藍田洞)이라 하였다. 『정감록(鄭鑑錄)』에 ‘밭 전(田)’자가 들어간 마을이 길하다는 예언이 있어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부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남밭·상촌[일명 웃마]·하촌[일명 아랫마]·못안이 통합되어 김천군 개령면 남전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개령면 남전동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남전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개령면 남전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광천1리 광한에서 감문면 금라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팔용산과 대양산 사이 도로변 양쪽에 남밭, 못안, 상촌, 하촌이 동서로 길게 흩어져 있다.

[현황]

남전리개령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2.5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02세대에 216명(남자 111명, 여자 10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남전1리·남전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 마을로는 남전·상촌·하촌·못안·대양묘(大陽妙) 등이 있다. 드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와 포도를 주로 재배하여 농가 소득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마을 뒷산에는 폐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연원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남전은 김천의 대표적인 일선 김씨(一善金氏) 집성촌으로, 400여 년 전 일선 김씨 농암공파(蘢岩公派) 17세손으로 문경현감을 지낸 김선경(金善慶)의 다섯째 아들 김윤양(金允讓)이 선산에서 이주해 와 정착한 뒤로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6·25전쟁 때는 피난처로 유명하여 마을 앞 강변 들에 수많은 피난민들로 넘쳐 났다. 이는 『정감록』에 ‘밭 전(田)’자가 들어간 마을로 들어가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을 품고 있는 팔용산 아래에는 1990년 정도까지 동제(洞祭)를 지냈던 여덟 마리 용이 승천을 했다는 팔용샘[八龍泉]이 있다. 동제 때는 샘물을 길어 새벽에 목욕을 하고 돼지를 잡고 제물을 장만해 제를 올리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동제를 지내지 않으면서부터 물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마을 입구 오른쪽 도로변에는 500여 년 전 축조한 약 1만 3223㎡ 규모의 남밭저수지가 있다. 풍수지리상 이곳이 일대의 혈맥이 모이는 명당인지라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큰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원래 광산 김씨 소유이던 땅을 파서 못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못안은 남밭저수지 뒤에 있는 마을로 저수지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대양묘(大陽妙)는 대양산 자락인 용정고개[龍井峴]를 사이에 두고 남전과 이웃한 마을로 대양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개령면 소재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거리상으로는 감문면 금라리에 가까워 생활권은 감문면에 속해 있다. 관련 기록에는 마을이 일제 강점기에 생겼다고 되어 있으나 구전에 따르면 파평 윤씨(坡平尹氏) 일가들이 집성을 이루며 살다가 떠났다고 하므로 일제 강점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남전과의 경계를 이루는 용정고개 정상부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우물인 용정(龍井)이 있다. 원래는 작은 샘이었으나 2000년 도로 공사를 하면서 커다란 웅덩이로 변해 버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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