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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03
한자 金泉歷史-文化-寶庫甘川
영어의미역 Gamcheon River, the Repository of Gimcheon's History and Culture
분야 지리/자연 지리,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집필자 송기동

[개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 녹색 성장이다. 현재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과 홍수 예방, 안정적인 수자원 확보 등을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4대 강 정비 사업과 함께 하천 유역의 문화와 관광 자원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 또한 주목할 말한 일이다. 이것은 대표적인 자연 환경인 하천이 가진 친환경적이면서 녹색 자원으로의 활용 가능성을 확인해 준 것이라고 하겠다. 궤를 같이하여 김천 지역의 최대 하천이며 낙동강의 큰 지류인 감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이때야말로 김천 지역 문화의 원류이자 역사의 보물 창고인 감천의 자연 환경과 역사, 문화, 관광 자원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은 매우 중요하다.

[김천 자연 환경의 모태(母胎), 감천]

감천(甘川)은 김천시를 대표하는 하천으로 대덕면 우두령의 봉화산[높이 901.6m]과 내감리국사봉[높이 875.1m], 덕산리대덕산[높이 1290.9m]에서 발원하여 북동 방향으로 흐르다가 김천시를 관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김천시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감천은 유역에 머금은 고봉들과 함께 김천 지역의 대표적인 자연 환경을 형성하면서 예부터 이 고장을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게 했다. 김천시는 영남의 서북 내륙 지역에 해당하여 소백산맥의 여러 지맥(地脈)들에 둘러싸여 있다.

소백산맥의 지맥 중 금릉평야를 기준으로 황악산(黃岳山)[1111m], 대덕산(大德山)[1290m], 수도산(修道山)[1316m], 백마산(白馬山) 등은 비교적 높은 산과 골짜기를 형성해 그 골을 중심으로 모두 19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하천이 발원하여 대체로 여섯 갈래로 합쳐진다. 이들 하천은 감천면, 대항면, 남면, 개령면, 아포읍 등에 소규모 충적평야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여섯 갈래의 하천은 모두 감천직지천(直指川)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데, 특히 감천이 만든 충적평야가 가장 넓은 들을 이루고 있다.

감천은 김천시 중심부를 남서에서 북동쪽으로 꿰뚫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김천 지역 제일의 하천이자 낙동강 중류부의 대표적인 지류이다. 그 줄기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우두령 계곡인 김천시 대덕면 대리 봉화산 발원샘, 속칭 너드렁상탕에서 시작한다. 김천문화원에서는 1999년 김천시 승격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감천발원지조사위원회’를 구성, 3개월여의 조사 과정을 거쳐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와 김천시 대덕면 대리의 경계를 이루는 봉화산 너드렁상탕을 감천 69㎞의 발원지로 정했다. 그리고 그 해부터 매년 감천발원제를 올리며 감천의 음덕을 통한 지역민의 안녕과 김천의 발전을 기원해 오고 있다.

대덕천은 임기리에서 새목골의 물을, 관기리에서 감호천(甘好川)의 물을 모아 흐르다가 지례면에 이르러 구남천과 부항천을 합하면서 하천 폭이 확대되고, 구성면에서 무릉천·하원천이 합쳐진다. 감천조마면에서 강곡천대방천을 합하고 북쪽으로 흐르다가 김천시 신음동 속구미에서 김천 제2의 하천인 직지천과 합류하여 수량과 하천 폭을 급격하게 넓힌다. 유연한 그 줄기는 다시 북동쪽으로 흐르면서 농소면율곡천, 남면의 송곡천과 연봉천 그리고 개령면에서 아천감문천을 모아 감문면에 이르러 외현천을 받아 감문면 태촌3리[일명 배시내마을]에서 김천을 벗어나 구미시 무을면에서 대천과 합하고 선산읍 원동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감천의 유로는 총 연장 69㎞, 유역 면적은 1018.2㎢로 경상북도 김천시와 구미시 2개 시에 걸쳐 있으며, 유역 내에 4만 8939가구, 16만 946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감천조마면 강곡리에서 아포읍 예리까지 28.9㎞가 국가 하천이며, 감천의 지류에 해당하는 대덕면 대리에서 구성면 광명리까지의 28.5㎞ 구간의 감천을 비롯한 18개 소하천이 지방 2급 하천으로 속한다.

이외에도 지방 하천으로 부항면 어전리에서 지례면 도곡리 간 12㎞의 부항천, 구성면 월계리에서 구성면 구미리까지 5.25㎞의 무릉천, 대항면 주례리에서 구성면 하원리까지 9.25㎞의 하원천, 조마면 신곡리에서 조마면 강곡리까지 6.7㎞의 강곡천, 조마면 대방리에서 감천면 용호리까지 8㎞의 대방천, 봉산면 광천리에서 신음동까지 17㎞ 구간의 직지사천, 대항면 운수리에서 봉산면 덕천리까지 6.5㎞ 구간인 백운천, 어모면 능치리에서 개령면 서부리까지 17.25㎞ 구간의 아천, 감문면 문무리에서 어모면 군자리까지 6.8㎞의 감문천, 농소면 봉곡리에서 남면 초곡리까지 11.5㎞의 율곡천, 남면 부상리에서 아포읍 봉산리까지 10.5㎞의 연봉천, 개령면 남전리에서 개령면 광천리까지 5.5㎞의 광천천, 감문면 금곡리에서 감문면 태촌리까지 8.73㎞의 외현천, 아포읍 대성리 0.4㎞의 구미천, 남면 부상리 1,74㎞의 경호천 등이 감천의 지류로 속한다. 이와 같이 감천은 김천시를 관류하며 크고 작은 소하천과 지류를 통해 김천 전역을 비옥하게 살찌우고 있다.

[감천이 빚어 낸 김천시의 역사와 문화]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조선 후기 실학파 지리학을 대표하는 『택리지(擇里志)』에서 다음과 같이 김천 지역을 평하고 있다.

“김산(金山)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 물이 합해져 감천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접어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 물을 관개하는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 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김산은 판서 최선문(崔善門)의 고향이다. 선산에는 금오산이 있는데, 문하주서 길재(吉再)의 고향이다. 최선문노산군(魯山君)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고, 길재는 고려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

이중환은 1717년(숙종 43)부터 1722년(경종 2)까지 김천도찰방으로 재임하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접고 30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풍토·지리·산물·교통을 집대성한 우리나라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이중환이 김천 지역에 해당하는 지례·김산·개령을 평하면서 감천의 효용성과 중요성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중환김천역의 수장인 도찰방으로서 이 지방이 가지고 있는 편리한 교통과 시장성·교역성에 더해 수로 기능까지 가지고 있던 감천의 활용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감천은 김천 지역의 역사·문화·사회·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 그 역사는 선사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감천 상류인 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에서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를 비롯한 토기와 동검 등 각종 유물들이 대량 발굴되어 김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원 전후 낙동강 주변에 소국이 성립되던 시기 낙동강 지류로 속하는 감천 유역의 김천 지역에는 변한계 12국의 하나인 감문국(甘文國)이 성립되었다. 이 감문국의 건립 주체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감천 상류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들이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 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과 감문 일대로 이동해 형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감천은 김천 역사와 문화가 비롯된 모태천(母胎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천 중류인 개령평야를 기반으로 성립된 감문국은 김천 지역이 가진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해 고대 국가로의 도약을 꾀했지만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감문국을 정벌한 신라는 감천 변 개령 일대에 감문주를 설치하여 삼국 통일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했고,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에 이르기까지 감천추풍령과 함께 영남 내륙의 전략적 요충으로 활용되어 왔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이후 감천 주변은 시장으로 꾸려지며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김천은 삼도의 중심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일찍이 도로가 발달했는데, 특히 남해에서 낙동강을 통한 영남 내륙으로의 접근로로서 감천 수로가 적극 활용되었다. 감호동 감천 변에 김천장이 형성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시장으로 발전해 조선 후기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까지 번성한 배경에는 감천이 가진 수로의 역할이 컸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감천은 국방의 보루로서 군사적인 역할도 했다. 231년 감문국이 신라에 멸망된 후 역시 감천 변의 또 다른 소국인 주조마국이 562년 대가야와 함께 신라에 멸망될 때까지 파상적인 신라의 공격 속에서도 330년을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감천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방어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 시대 들어 전란이 잦아지면서 감천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감천 발원지가 위치한 대덕면은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 등 3개 도의 접경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우두령은 임진왜란과 동학, 6·25전쟁 등 역사의 고비 때마다 호국의 보루 역할을 했는데, 임진왜란 때는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金沔) 등 의병 2,000명이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해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 1500명을 급습해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의 현장이다. 또 18세기 초 무신란 때는 이인좌(李麟佐)의 아우 이웅보(李熊輔)와 김천에 주둔한 관군과 의병 사이에 우두령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감천 주변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명당이 지례면 도곡리구성면 상원리·광명리, 개령면 동부리모암동·양천동을 들 수 있다. 지례면 도곡리 감천 변에 있는 궁을산은 일찍이 명당 터로 유명해 조선 17대 효종의 셋째 딸인 숙경공주와 여섯째 딸인 숙정공주의 태가 안치되어 있다.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는 구성면 상원리연안 이씨 집성촌으로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이름이 높다. 입향조인 이말정(李末丁)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명문가에 이름을 올렸는데, 묘소가 감천에 인접한 금채낙지처(金釵落地處), 즉 금비녀가 떨어진 형국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구성면광명리 또한 이름난 명당으로, 감천이 마을을 감고 흐르는 반월형의 지세로 김산 5대 반촌으로 일컬어진다. 개령면 동부리감천 변에 솟아 있는 감문산은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되는 호두형에 속하는데, 그 살기가 너무 강해 감천을 경계로 너머 맞은편에 자리한 아포읍 대신리 함골에서 연이어 사람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그러자 선산 도리사에서 직지사를 짓기 위해 선산과 김천을 오가던 아도화상(阿道和尙)감문산의 살기를 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심장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이 숲을 이루어 산다는 의미로 계림사(鷄林寺)라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김천을 대표하는 사모바위할미바위 전설은 감천의 혼인형국의 풍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로 볼 때 김천의 형세는 신랑·신부가 마주보고 혼례를 올리는 혼인형국이라고 한다. 모암산의 사모바위가 신랑, 양천동할미바위가 신부로 감천 너머의 황산을 병풍삼아 혼례를 올리므로 축하객이 넘쳐나야 하는데, 이런 이유로 김천장이 크게 번성할 때 김천 지역에도 영화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쉼 없이 굽이쳐 오던 감천은 중하류에 해당하는 개령면감문면 일대에 이르러 이 지방 최초의 소국인 감문국을 품는다.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인 경주 지방 사로국에 의해 멸망한 비운의 왕국 감문국은 고대 국가로의 성장을 모색한 사로국 군사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1700년의 풍상 속에서도 감문산성을 비롯한 세 개의 산성과 궁궐 터인 동부연당과 김효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들은 안타까운 전설과 함께 남아 있다. 감문면 문무리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들이 무수하게 남아 있어 감천이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와 삼한 시대를 거쳐 김천 역사의 원류가 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감천의 범람으로 새겨진 역사와 아픔]

감천은 강바닥이 높고 강폭이 협소해 예부터 범람이 잦아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을 안겨 준 사례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도 감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병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감천에서의 최초의 인명 피해 사고는 삼한 시대 감문국과 관련된 것으로, 중국 사서인 『동사(東史)』에 “아포반대발삼십야도감천수견창이퇴(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 즉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른 명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 퇴각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피해 규모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불어난 강물로 인해 군사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지례면 교리에서 상부리까지 감천을 따라 방천이 조성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채(李采)[1745~1820]가 지례현감으로 재임할 때 지례읍민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둑이라고 한다. 이후 당시의 현민들이 이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공제(李公堤)라 이름 했다고 전한다.

감천 주변은 풍광이 빼어나 천변에 크고 작은 정자가 세워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자가 잦은 수해로 유실되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정자로 이름난 구성면 상원리방초정도 1625년(인조 3) 건립된 후 1736년(영조 12) 감천의 범람으로 유실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00년대 초부터 김천의 상권을 보고 정착한 일본 사람들은 용두동 일대의 감천 변 저습지를 헐값으로 매입한 후 상가를 조성하고 본정(本町)이라 하여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했다. 그러나 장마철마다 감천의 물이 불어나 수시로 거주지를 위협하자 1920년대 수년에 걸쳐 지금의 우회 도로를 따라 긴 제방을 축조하기에 이르렀다.

개령면 동부리 감천 변에 남아 있는 고목 버드나무는 영남 예학의 종주로 일컬어지는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 부자가 심은 것이다. 김숙자가 개령현감으로 재임할 때 감천이 범람하여 개령면 동부리양천리 일대 곡창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제방을 축조하고 둑을 보강하기 위해 부자가 함께 버드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근대 이후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대규모 피해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36년 병자년 수해와 1987년 태풍 셀마, 1998년 수해, 2002년 태풍 루사, 2004년 태풍 매미 등을 들 수 있다. 병자년 수해 때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자료상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김천 지역의 많은 마을이 이때 침수되거나 유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만든 마을들이 신기(新基), 새터, 새마을 등으로 당시의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때 감천의 둑이 터져 조마면 장안리 일대의 농경지가 유실되자 조선총독부에서 경지 정리를 핑계로 주민들의 서명을 받은 후 일본 사람들에게 불하하여 원성을 산 일도 있는데, 지금도 일대의 들은 다까세농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사 이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감천 범람의 가장 큰 피해는 2002년 8월 31일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것이다. 루사가 김천 지역에 상륙하면서 하루 강수량으로는 사상 최고치인 358㎜를 쏟아 부으며 24명의 인명 피해를 비롯해 김천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안겨 주었다. 당시 감천 변의 수많은 농경지와 가옥이 침수되고 감천을 가로 지르는 경부선 철교가 붕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전국에서 온정의 손길과 지원에 힘입어 빠른 시일 내에 완벽히 복구하는 기적의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감천의 미래 청사진]

감천은 김천시의 중심부를 관류하는 대표적인 자연 환경이다. 근래 김천시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보고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감천의 유지와 관리, 미래에 대한 발전 계획이 다각도로 구상되고 있다. 특히 국토해양부에서 4대 강 유역 국가 하천에 대한 마스트플랜에 감천 정비 계획에 소요되는 3785억 원의 예산이 확정되어 앞으로 종합적인 감천 개발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 도심지 침수의 원인으로 지적된 직지천 합류부의 하천 확장과 감천 주변 저류지 설치 등 수해 예방을 위한 치수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또한 감천을 다기능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하천 환경 및 친수 공간 조성 사업으로 감문면 태촌리 배시내나루터 복원, 실크로드 조성, 자전거 및 버드나무길 조성 등 6개 친수 프로젝트도 추진된다. 감천을 따라 산재한 관광 자원과 문화 유적을 연계하고 감문국 관련 유적지를 복원하는 4개 문화 유적 프로젝트도 함께 추진될 예정이어서 앞으로 감천이 복합 문화 관광, 레저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2006년 11월부터 감천 상류의 지류인 부항천 일대에 부항댐 공사가 2011년 완공을 목표로 총 476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진행되고 있다. 부항댐감천 연안의 홍수 예방과 김천시와 구미시 일대의 안정적인 용수 공급이 주목적이며, 친환경·생태 학습 공간을 표방하여 댐 인근에 수달테마공원과 습지생태관찰원, 창포원, 물문화관, 생태 이동 통로가 조성된다. 또 수력 발전소의 기능도 병행하게 되어 연간 3,310Mwh의 전력을 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감천 정비 사업과 부항댐 건설이 완료되면 감천 유역이 영남 내륙의 문화, 관광, 레저의 명소로 각광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감천에 깃들어 사는 부부 이야기]

“허망합디다. 고향으로 돌아와 간신히 자리를 잡았는데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나니 기가 막히고 말이지요.”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가 고향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가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96년 귀향해 감천 변에 음식점을 개업했던 이수원[66세]은 연신 몸서리를 쳤다.

“우리 어릴 때 감천하원천이 만나는 상좌원 앞 감천백사장은 참 그림 같았어요. 구성면사무소 앞으로 고목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그 밑에서 발가벗고 수영하며 은어·피라미를 잡아 구워먹고 놀았던 기억이 그림같이 남아 있단 말이지.”

이수원은 감천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이 결국 고향을 다시 찾게 만들었는데 실망도 많았다고 한다.

“막상 돌아와 보니 예전의 그 고향이 아니더라고. 그 사이 감천도 직강 공사로 큰 낙차공이 생겨서 많던 은어나 피라미도 사라지고. 수해로 버드나무도 몽땅 뽑혀 나갔고 말이지.”

1996년 감천을 마당삼아 고향이 바라다 보이는 구성면 미평리 운동마을 입구 감천 변에 매운탕집을 개업한 이수원은 솔잎을 이용한 다양한 음식을 개발해 언론 매체에 소개되면서 김천 최고의 맛집으로 명성을 쌓았으나, 2002년 8월 31일 김천을 강타한 태풍 루사 때 식당이 수몰되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집으로 이어 주는 유일한 다리마져 유실되어 한 달여간 고립되어 헬기로 생필품을 공급받아야 했고, 뗏목을 타고 감천을 건너다니던 광경이 언론에 수차례 방송되어 당시 대통령 노무현이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하기까지 했다. 각계의 온정과 부부의 열정으로 식당은 복구되었다지만 부인 배순옥은 이때부터 물만 보면 두려움을 갖는 증상이 생겨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감천이 좋아 여생을 보내려고 감천으로 돌아왔는데 감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었지.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다들 우리 부부가 고향을 떠날 줄 알았다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거든. 부산에서 떠나 올 때 약속을 했단 말이지. 꿈속에서조차 그리던 감천이 내려다보이는 감천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손님을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선 부부는 두 손을 곡 마주잡았다. 뉘엿뉘엿 넘어가던 햇살이 감천 물을 따라 맑게 웃는 듯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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