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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32
한자 儒敎
영어음역 Yugyo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집필자 이기훈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 전개된, 공자를 존신하는 학문 또는 종교.

[개설]

유교는 인(仁)을 도덕의 최고 이념으로 삼는 학문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 시대 이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에 태학(太學)이 설립되고,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論語)』, 『천자문(千字文)』을 전하며 신라에 국학이 건립된 것이 바로 이 점을 말해 준다. 고려 때에는 태조 왕건이 불교를 숭상하여 유학이 쇠퇴하는 듯했으나 성종 대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말기에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와 주자학이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안향의 학문은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으로 이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에서 이황(李滉), 이이(李珥)로 이어지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다양한 논변들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상적 논의들이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겪고 난 후 유학에 대한 반성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나게 되고 한말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유가로서 살신성인의 대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일제 시기에 성균관이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나 해방 이후 다시 환원되고 유도회를 결성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게 된다.

[김천 유교의 전개]

조선에 들어 유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이러한 이념을 실천학고자 관(官)이 위주가 되어 유학을 부흥하고 보급하였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낙동강(洛東江)을 끼고 있었는데, 이 ‘낙(洛)’자에는 중국의 낙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유학을 보급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 향교(鄕校)를 설치하는데, 김천에는 김산향교·개령향교·지례향교 세 곳을 두었다. 이는 조선 중후기 유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안동에 안동향교와 예안향교가 있었던 것과도 대비할 수 있다.

안동에는 서원이 많아[서원만 대략 62개소] 관학을 대처할 수 있었으나, 김천에서는 서원이 많지 않아[서당을 포함하여 대략 20개소 전후] 관학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관학은 충효의 유교 원의에 더욱 충실하였다. 이 때문에 김천의 유교는 이론적인 것보다 충의와 절개를 더욱 중시하였다. 이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 바로 이숭원(李崇元)[1428~1491]과 조위(曺偉)[1454~1503]이다.

이숭원은 참으로 언관(言官)의 기질이 보였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 22년 12월 26일의 마지막 기사에서는 그를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웠으며, 청렴하고 평온하며, 공경하고 검약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벼슬살 때 근신하고 주밀하여 여러 차례 권세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며, 비록 명예와 지위는 이미 높았으나, 집이 가난하였는데도 평안하게 살았다.”고 하였다. 또 조위는 조선 초기의 사림의 맥을 이었으며, 문장이 화려하여 수많은 문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 배경에는 바로 조선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있는데, 그는 비록 김천 출신은 아니지만 김천에 직접 경렴당(景濂堂)[이후 경렴서원으로 개수됨]을 짓고 김천 지역 유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이에 김천은 충의와 절개를 중시하는 유학적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김시창(金始昌)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가례(家禮)』에 의한 상례(喪禮)를 철저히 준행하였다.

아울러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김천의 유학은 지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천은 경상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청도와 가깝다. 이러한 이유로 분명 지역적 특색은 이황 계열의 영남학이 있었으면서도 또한 기호학이 겹쳐져 있다. 김천의 여러 서원 가운데 춘천서원(春川書院)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고 있다. 이는 김천이 송시열의 본향인 충청도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김천의 유학자가 바로 이의조(李宜朝)[생몰년 미상이나 1700년대 활동]이다. 춘천서원은 바로 이의조가 세운 서원이다. 이의조는 기호노론인 이재(李縡)[1680~1746]와 송능상(宋能相)[1710~1758]의 문인이며,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김천 지역에는 여러 성씨들이 기호 노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송시열의 후손인 은진 송씨들과 이의조의 후손인 벽진 이씨들이 기호 노론의 사상과 이론을 실천하였다.

1800년대 이후 김천은 김천을 둘러싼 지역과 학문적 연관성을 맺는 경향이 많았다. 1800년 이전 김천은 뚜렷이 영남학과 기호학이 함께 존재하여 왔다. 이 하나만으로도 김천 유학은 타 지역에 비해 특색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만 해도 김천의 기존의 학맥이 이어져 오고는 있었으나, 1800년대 이후는 영남 지역의 학파들과 교류가 늘었다. 이 점은 영남학이 1600~1700년대를 거치면서 영남학 내에 학파적 발전을 이루면서 김천 주변 지역인, 안동은 물론 상주·칠곡·성주 등 접경 지역에 퇴계 학맥의 분파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성주에는 한주학파인 이진상(李震相)이 있었고, 상주에는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이은 유주목(柳疇睦), 칠곡에는 장현광(張顯光)을 이은 장복추(張福樞) 등이 있었다. 심지어 퇴계학 내부에서도 학파별 대립이 있었지만 김천에서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잘 융화시켰다. 일제 시대 들어서면 송준필의 성리설은 『심통성정삼도발휘』에 체계적으로 나타나는데,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적 입장을 모두 일면적인 설로 비판하면서 양자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독자적인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의의]

김천 지역의 유교는 이념적으로 유교의 충의와 절개를 지닌 조선 초기 사림의 특색을 지니고 있으면서, 조선 중·후기에는 영남학과 기호학이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학파에 따른 내부의 이론적 투쟁은 별로 없었다. 이는 김천 지역이 유교의 이념에 맞는 것이라면 모두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유학에서의 수양과 실천에 힘을 썼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개령향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영남 우도 만인소 사건이다. 이후 유생들이 주축이 된 의병 항쟁과 김천의진[1896년 결성, 의병장 이기찬] 역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신으로 이루어졌다.

현대에 들어 유교적 제례나 의식은 남아 있지만 유학 연구 자체는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김천 지역 전통 유학 사상에 대한 연구는 타 지역에 비해 아직 연구가 덜 된 실정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지역학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김천 지역에 대한 유교·유학 연구도 늘어나는 방향에 있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유교 문화와 사상이 발굴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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