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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49
한자 金松里
영어음역 Geums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순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5.05㎢
가구수 199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479명(남자 243명, 여자 236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465년 기계 유씨(杞溪兪氏) 유익명(兪益明)이 들어와 살면서 일대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마을 이름을 송곡(松谷)이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마을의 소나무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마을 이름을 금곡(金谷)·금송(金松)이라고도 하였는데, 금송리(金松里)도 여기서 유래한 이름으로 여겨진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고가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대방(大芳)·원동(院洞)·이화리(梨花里)·송곡·하송(下松)·상송(上松)이 통합되어 김천군 감천면 금송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송1동·금송2동·금송3동으로 분동되었고, 금릉군 감천면 금송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금송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마을 서쪽으로 감천이 흐르고 하천 변에 김천의 대표적인 평야로 꼽히는 금송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돌미산[일명 톨미산]에 날아가는 새의 형상을 한 황새바위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석재를 채취하면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현황]

금송리감천면 소재지인 광기리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5.0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99세대에 479명(남자 243명, 여자 23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무등산을 경계로 농소면 용암리와 이웃하고 있다. 금송1리~금송4리 네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벽진 이씨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문화 유적으로 김한영 신도비, 임감규 처 달성 서씨 효행비가 있다.

자연 마을로는 원동·대방·이화·송곡·상송·하송 등이 있다. 원동은 1648년(인조 26) 경렴서원(景濂書院)이 마을 앞에 세워진 후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1600년대 초 벽진 이씨 평정공파(平靖公派) 20세손으로 수군절제사를 지낸 이홍명(李弘明)이 낙향한 이래 대대로 벽진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뒤에 대덕면 중상리에서 연안 이씨(延安李氏) 주부공파(主簿公派) 일족이 이주해 정착하였다. 마을 한가운데는 입향조 이홍명이 자신의 호(號)를 따서 세운 사미정(四美亭)이 고풍스럽게 앉아 이 마을이 벽진 이씨 집성촌임을 상징하고 있다.

경렴서원은 당시 김산군수 조송년(趙松年)이 세워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이약동(李約東)을 배향하였다. 1673년(현종 14) 인근 이화리로 옮겼고 1762년(영조 38) 김산군수 윤담(尹淡)이 자산 기슭으로 이전하였으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처럼 서원을 자주 이전한 것은 마을들이 감천 변에 가까워 침수가 잦았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대방은 원동과는 삼막골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성황대이고개를 경계로 농소면 용암리 대방과 이웃하고 있는데 지명마저 두 마을이 같아서 흥미롭다. 용암리 대방이 마을 앞에서 시작된 제방이 길게 월곡천으로 이어져 있어 큰 제방이라는 뜻에서 대방(大防) 또는 큰 마을이란 뜻의 대방(大坊)이라면, 금송리 대방은 ‘향기 방(芳)’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옛날 인근 이화리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화리는 원래 이아리였는데 1821년 박세근(朴世根)이 성주군 벽진면 해수동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배나무를 심고 ‘배나무 이(梨)’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대표적인 밀양 박씨 집성촌으로 2010년 11월 현재 전체 56호 중 40호가 밀양 박씨이다. 마을 앞 부거리들 일대에 부거리로 불리는 또 다른 마을이 있었으나 마을에 뱀이 들끓어 폐동되었다. 상송은 송곡을 기준으로 송곡 윗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고, 하송은 그 아랫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상송 뒤로는 원속골, 대방골, 오록골, 막골 등 많은 골짜기가 있는데 골이 깊어 예부터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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