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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인민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20
한자 金泉人民委員會
영어음역 Gimcheon Inmin Wiwonhoe
영어의미역 Gimcheon People's Committe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1945년 9월연표보기
성격 정치 단체

[정의]

1945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설립된 민간 자치 기구.

[개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무렵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변경되어 발족한 것이며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김천 지역의 자치를 담당한 민간 기구이다.

[변천]

1945년 9월 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김천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천인민위원회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임종업이 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위원회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임종업은 일제 강점기 김천 지방에서 청년 운동과 신간회 운동,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김천경찰서, 김천군청, 김천세무서, 김천읍사무소 등 김천의 주요 관공서를 차례로 장악하고 김천군의 자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 진주 후 미군이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군정을 선언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활동도 차츰 힘을 잃어갔다. 김천인민위원회김천군 장악력도 미군정청 일행이 김천에 들어오면서 크게 약화되었고 김천 지방 관공서는 모두 미군정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에 열릴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에 보낼 대표로 임종업, 권상집, 이영희 등을 선출하였다. 한편 김천에서는 김천인민위원회와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김천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김천농민조합은 1945년 12월에 열릴 전농 결성 대회에 참석할 대표로 김인수, 나정운, 조경환 등 3명을 선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5년 11월 김천인민위원회 청년자살자동맹 맹원들이 50명의 한국인 관리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김천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고를 공공장소에 부착하였다. ① 현직에 있는 모든 경찰은 임시직이며, 멀지 않아 인민위원회가 아놀드 소장의 포고에 의하여 정규 경찰을 임명할 것이다. ② 앞으로 자산 계급, 일제 하의 경찰과 관리, 일본 군대에 참여한 자, 일제의 비밀정보원, 8·15 이후 조선의 복구 작업을 방해한 자 등은 선거권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 김천에서 활동했던 황태성은 1945년 12월 당시 경북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6년 이후 김천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여러 차례 충돌했으나 미군정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힘이 약화되었다. 그로 인해 대구에서 10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천군의 항쟁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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