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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민주청동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40
한자 金泉民主靑同盟
영어음역 Gimcheon Minjucheong Dongmaeng
영어의미역 Gimcheon Democratic Youth Alliance
이칭/별칭 김천민주청년동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1945년 9월 5일연표보기
해체 1946년 10월 3월연표보기
성격 청년 운동 단체

[정의]

1945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설립 목적 및 변천]

1945년 9월 5일 김천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한 후 김천인민위원회의 외곽 조직으로서 김천민주청동맹이 결성되었다. 김천민주청동맹김천군의 통일된 청년 운동 조직으로서 결성되었다. 김천민주청동맹의 위원장은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의 사회운동가이면서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탄압을 받은 나복기이었다. 김천민주청동맹은 김천농민조합과 함께 좌익 성향을 지닌 단체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김천민주청동맹김천인민위원회와 함께 김천경찰서를 비롯하여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이수한이라는 좌익 청년이 김천경찰서 사법 과장 홍기식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수한은 “일본·만주 등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8·15해방 이후 돌아와 민주청동맹 간부로 일하던 중, 일제하의 관리가 독립촉진회 회장이 되고 독립 운동 지사를 탄압한 경찰이 그대로 유임되어 애국자를 탄압하는데 분개하여 홍기식을 사살하였다.”고 밝혔다. 이로 인하여 이수한은 무기형을 받았으나, 그는 인민재판에 회부시켜줄 것을 주장하며, “역사는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1946년 3월에는 김천민주청동맹, 의용대 등과 애국청년단, 광복청년단, 청년회 사이에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주청동맹을 비롯한 의용대, 인민위원회 등 좌익계 30여 명과 애국청년단 등 우익계 12명이 체포되었다. 1946년 4월말 김천민주청동맹은 서울에서 열린 조선민주청년동맹 전국대회에 대표를 파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46년 10월 3월에는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사건이 김천에 파급되었다. 곧 김천민주청동맹을 비롯한 군중 500여 명이 김천경찰서에 몰려들어 서장에게 파업을 종용하고, 경찰서를 내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날 오후 4시 무렵 대구로부터 국방경비대가 도착하자 군중들이 흩어졌다. 간부로 지목되는 자들은 행방을 감추었으며, 용의자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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