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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98
한자 鄭鸞
영어음역 Jeong Ran
이칭/별칭 재우(載羽),운재(雲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1555년연표보기
활동 조선 전기[중종]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원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해주(海州)
대표 관직 승정원승지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재우(載羽), 호는 운재(雲齋). 아버지는 생원(生員) 정은견(鄭銀堅)이다. 아들로 정수(鄭遂), 정연(鄭延), 정준(鄭遵), 정손(鄭遜), 정지(鄭遲), 정탁이 있으며, 정탁은 1564년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하였다.

[활동 사항]

정란(鄭鸞)은 지금의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탄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뜻이 곧고 호학하여 주위로부터 인물이 났다는 평을 들었다. 사촌 형인 신당(新堂) 정붕(鄭鵬)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익혔으며, 중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사림으로부터 문명(文名)을 얻었다. 성균태학생(成均太學生)으로 학문에 열중하고 있던 1537년(중종 32) 사림과 조정 관료들을 중심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朝)의 신원 회복을 위한 상소와 연명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성균관 태학생들의 연합 상소 운동의 선두에 섰고, 날카로운 논리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 결과 학문과 인격 면에서 태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림과 고위 관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학문에 정진하기가 어렵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정란이 건강이 회복되자 곧바로 전라도 경양찰방(景陽察訪)을 제수하였고, 이곳에서 민정을 살피며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해 신망받는 목민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555년(명종 10) 승정원승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후 행적은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개령지(開寧誌)』와 『김천군지』에 『대동야승(大東野乘)』을 엮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학문과 저술을 활발하게 한 것으로 이해되나, 사실 관계는 검증이 필요하다. 정란의 증손인 정후시(鄭厚時)가 개령의 역사인 『탄동지(炭洞誌)』를 엮었다는 점으로 보아 정란의 유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

묘소는 선산이 있는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원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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