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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73
한자 裵興立
영어음역 Jang Singang
이칭/별칭 백기(伯起),동포(東圃),효숙(孝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손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546년연표보기
활동 1565년연표보기
활동 1572년연표보기
활동 1589년연표보기
활동 1594년연표보기
활동 1607년연표보기
몰년 1608년연표보기
추모 순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묘소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대방곡
서원 경상북도 예천군 삼강서원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황새마을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영흥부사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백기(伯起), 호는 동포(東圃). 아버지는 현감 배인범(裵仁範)이다. 외할아버지는 북일(北逸) 김익(金瀷)이다.

[활동 사항]

배흥립(裵興立)[1546~1608]은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할머니 한양 조씨는 대장기(大將旗)가 마당에 서는 꿈을 꾸었는데, 태어났을 때 과연 장군의 골상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손 훈계에 엄격하였는데도 유독 배흥립에게는 “이 아이는 가르침을 기다릴 아이가 아니다.”라면서 기대를 보였다.

5, 6세에 외할아버지 김익에게 배웠다. 7~8년간에 통사경전(通史經傳)을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병서(兵書)를 한 번만 읽고도 깨달았다고 한다. “장부 세상에 나서 어찌 문무를 따지랴!”면서 그 후로 당대의 명신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춘호(春湖) 유영경(柳永慶) 등과 동문수학하여 문무겸전의 인격을 닦았다.

20세인 1565년(명종 20) 음직으로 선공감감역관을 제수하여 명종을 배알하였는데, 왕이 배흥립의 풍채를 보고 무예를 닦도록 명하였다. 그 후로 무예에 전심하여 1572년(선조 5) 무과별시(武科別試)에 등과하였다. 이때 마침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머리카락조차 빗을 수 없어 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배흥립은 깨끗이 옷을 빨아 입고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고 어머니 곁에 누워 이를 자신에게 유인하는 효성과 인내심을 보였는데, 훗날 큰일을 할 만한 인물임을 엿보게 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기가 받은 재산 문권(文券)까지 “나는 녹봉이면 족하다.”면서 아우에게 다 넘겨주어 효성과 우애를 보여 주었다.

배흥립은 선전관청선전관을 비롯해 선략장군(宣略將軍), 사복주부(司僕主簿) 등의 내직을 거치는 중 1583년(선조 16)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왔을 때 도순찰사(都巡察使) 정언신(鄭彦信)의 막하로서 적의 소굴을 소탕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589년(선조 22)에는 흥양현감이 되었는데,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전함을 많이 만들어 임진왜란의 승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여립의 난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에게 봉급을 덜어 구제하였고, 사망한 장졸은 관포와 관마로 치상하게 하여 사졸과 백성이 어버이처럼 따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방장으로 권율·이순신 장군과 행주·당포·옥포·견내량·김산·진도·칠전도 전투에서 늘 선봉에서 용전분투하였다. 칠전도 싸움에서는 도망친 원균의 뒤를 맡아 단신으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용맹을 떨쳤다. 배흥립은 적탄에 투구가 깨져도 동요 없이 싸움을 독려하였다. 한산도 대첩에 크게 기여하여 이순신 장군이 전보에 공신으로 천거하였다. 특히 배흥립은 계급의 고하를 불문하고 마음의 벗으로 대하였다.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승계되었으며, 1594년(선조 27) 장흥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정유재란에는 전라도방어사로 봉급 중 곡식 100석과 각종 군기를 배에 실어 바닷길로 근왕병에게 조달하였다.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공조참판을 거쳐 1605년(선조 38) 선무공신으로 가선대부에 승계되었다. 1607년(선조 40) 영흥부사로 나아갔다가 병으로 돌아와 이듬해 작고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황새마을] 대방곡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배흥립의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인조 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효종 대 효자로 정려와 복호(復戶)[조선 시대에 충신·효자·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의 은전이 내려졌다. 그리고 1864년(고종 1)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려져 영구히 제사 지내게 되었다. 순조 대 삼강서원에 제향되었으며, 한산도 승전비에도 공적이 새겨졌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황새마을에 있는 배흥립 신도비는 비명은 강백년(姜栢年), 행장(行狀)은 유형원(柳馨遠), 행록(行錄)은 유정량(柳廷亮),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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