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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225
한자 文娘孝娘二孝閣
영어음역 Mullang Hyorang Ihyogak
영어의미역 Memorial Shrine to Munrang and Hyorang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26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혜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1979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263-1 지도보기
성격 효각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죽산 박씨 연흥군파 문중
관리자 죽산 박씨 연흥군파 문중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녀 문랑·효랑 자매의 효각.

[개설]

문랑·효랑 자매는 죽산 사람 박수하의 딸로 1709년(숙종 35)에 현풍 권력가인 청하 현감 박경여에게 선산을 빼앗겼다. 부호이자 권세가인 박경여가 박씨 선산에 자기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 하였다. 이장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박경여는 박수하 조부모의 묘를 파내고 묘를 이장한 뒤 비석까지 세웠다.

자매의 아버지인 박수하는 갖은 수단을 써서 묘지를 찾으려 하다가 오히려 관위에 구금되어 갖은 고문 끝에 하옥된 지 7일 만에 태장(笞杖)을 맞아 운명하였다. 자매는 억울함을 관가에 고했으나 성주목사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에 묘를 파헤치고 박경여에게 통보하니, 박경여는 사병을 거느리고 집을 포위하여 언니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때 언니의 나이 19세로 1712년(숙종 38)이었다. 아버지와 언니를 잃은 효랑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원한을 풀어주고 선조에게 욕됨을 바로잡으려고 상경하여 백방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여 어사가 출두하게 된다. 어사가 검시할 때 언니의 시신이 썩지 않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전국 유생들과 성균관까지 들고 일어나게 된다.

1724(경종 4) 문랑에게 정려가 내려지고 효랑에게는 복호 80결(結)을 내렸다. 그 후 효랑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리면 고품리 남평 문씨 문동도의 아들 문우징(文宇徴)에게 출가하나 불행하게 25세로 요절하였다. 효랑의 정려도 시가 쪽 유생들의 상소로 내려졌으며 영조는 죽은 언니에게는 문(文), 동생에게는 효(孝)라는 시명과 함께 정려명을 하사하였다.

“문헌공의 자손 매 맞아 죽은 넋이 남은 원한을 어느 곳에 가 호소하랴 아내는 정숙하고 딸은 효도하여 종은 충절을 다하니 만고에 강상을 밝힘에 제일가는 가문이로다.”

1934년 효녀 문랑효랑의 활동과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문학 작품[역사 소설]로 만든 『출천대효효낭전(出天大孝孝娘專)』이 출간되었는데, 당시 박경여의 문중 사람들이 이 소설을 나오는 대로 구입하여 소각하였다고 한다.

[변천]

두 자매의 정려비는 처음에 도암리에 세워졌으나 효랑의 비는 1916년 시가인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로 옮겨졌다. 두 자매가 태어난 도평리에 있는 경상북도 유도회와 종친에서 1978년 불천지위 사당인 박씨 선조 문헌공의 사당 청현사문랑의 정비를 옮기고 비각을 세웠다. 문랑·효랑비는 두 자매의 효를 기리기 위해 문헌공의 사당인 청현사로 옮기면서 1979년 다시 세워졌다.

[형태]

문랑비는 높이 50㎝, 가로 30㎝, 두께 10㎝의 화강암에 ‘만고효녀죽산박씨증시문랑지비(萬古孝女竹山朴氏贈諡文娘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전면에 새겨진 글자가 전부이기 때문에 언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는 시멘트로 되어 있다.

좌측에는 문랑의 비가, 우측에는 문랑·효랑의 비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좌측의 것이 원래의 것으로 후대에 만든 비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우측의 것은 새로이 세운 것으로 비대석을 받치고 상부에 이수를 두었다. 사면 모두 홍살창을 설치하고 정면 홍살의 중앙부는 출입할 수 있게 착탈식으로 되어 있다.

[현황]

소유자는 죽산 박씨 연흥군파 문중으로 되어 있으며 관리가 잘 되어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한 집안에서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 『출천대효효낭전』이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는데, 전국적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근대 유산으로서 희귀본이라는 생각이 들며, 이 비는 삼강오륜을 소중히 하는 당시 사회의 풍조를 잘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문랑·효랑의 이야기가 이용범의 『사람됨의 도리 효』[바움, 2004]에 소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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