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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867
한자 崔益大
영어음역 Choe Ikdae
이칭/별칭 사겸(士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719년연표보기
활동 1741년연표보기
활동 1754년연표보기
활동 1779년연표보기
활동 1780년연표보기
몰년 1783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안영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화순(和順)
대표 관직 낙안군수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사겸(士謙). 아버지는 최응화이다.

[활동 사항]

최익대(崔益大)[1719~1783]는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윗대 조상인 수우당 최영경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집안이 몰락하였다. 그는 “빛나던 가문은 빛이 없어지고, 당장에 끼니를 잇지 못하시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신다. 붓을 잡아 선비로 나서는 일은 너무도 멀다. 내 장차 무과로 나서리라.”고 다짐하고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무과로 출사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741년(영조 17) 22세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셔 출사하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사헌부감찰을 거쳐 사천현감이 되었다. 사천현감이 되었을 때 고향의 어머니에게 쌀이 아닌 피로 보낼 정도로 청렴하였고, 임기가 다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사천 사람들이 놓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1759년(영조 35) 어머니를 여의었고, 1779년(정조 3) 선전관청선전관을 역임하다가 1780년(정조 4)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민폐를 덜고 백성 돌보기를 자신의 가족을 대하듯 하였다. 가뭄이 들자 금보단(金普壇)이나 황사(隍社)에 나아가 “이 고통의 허물은 나에게 있다.”라면서 기우제를 올린 끝에 비가 내리자 군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임기가 만료되어 고향으로 가는 그를 보고 군민들이 눈물로 만류하였고, 이후 군민들은 최익대의 화상을 그려 충민공 임경업 장군의 영당에 함께 모셨다. 즉 생사당(生祠堂)을 마련한 것이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 효성을 다하고 가문을 빛내며 목민관으로서 최선을 다한 최익대는 1783년(정조 7) 64세 일기로 영면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모에게 피곡(皮穀)을 보낼 때 사용한 가죽 가방을 증손 최영선이 보관하였다. 영정은 1924년부터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 있는 안영사(安影祠)에 모셔져 있다. 사당에 ‘통훈대부 행낙안군수 최공(通訓大夫 行樂安郡守 崔公)’이라 쓴 큼직한 위패가 있고, 그 뒷벽에 의자에 앉아 왼손에 홀을 쥐고 사모관대의 조복 차림을 한 초상화가 걸려 있다. 무과에 급제하였을 때 받은 어사화(御史花)와 벼룻집, 홍패(紅牌), 경대(經臺), 밀납(密蠟) 등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03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선조 수우당 최영경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윗대 조상인 수우당 최영경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2) 당장에 끼니를 잊지 못하시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신다 ->당장에 끼니를 잇지 못하시는 늙으신 부모님이 계신다 3) 경태(經台), 밀납(密蠟) 등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경대(經臺), 밀납(密蠟) 등을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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