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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려 만든 놋쇠, 방짜징과 방짜유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10
영어의미역 High Quality Hammered Brass Gongs and Brassware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133-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재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1986년 12월 11일연표보기

[개설]

방짜유기란 놋쇠를 녹여 두드려 만든 생활 용구를 말한다. 김천 지역은 예부터 경기도 안성과 충청북도 충주·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시]와 함께 유기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두드려 만드는 방짜유기의 명산지로는 김천이 단연 으뜸이었다.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말까지 지금도 약수동 또는 약물내기로 불리는 김천시 양천동의 거창 방면 국도 변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의 유기 공방이 밀집되어 있어서 김천 지역 명물로 자리 잡았다.

유기(鍮器)는 농기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 김천을 대표하는 산업으로서 약수동 일대 30여 공장에서 연중 생산되었다. 김천 유기 공업의 발달 배경에는 김천 지역이 가진 시장성과 편리한 교통을 들 수 있다. 개항기까지 김천역감천 변에 형성된 김천장은 김천 지역 유기 산업을 발전시킨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김천은 전라도·충청도·경상도의 삼도 경계에 위치하여 각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의 집결이 용이했고, 경상도 일대의 20여 개 속역을 거느린 김천역은 주변 역으로 연결되는 관로가 거물망처럼 연결되어 문물과 인마(人馬)의 이합집산이 활발했다. 특히 남해의 해산물이 낙동강을 통해 거슬러 올라 올 수 있는 수로 중에서 삼도의 경계까지 배가 닿을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던 감천으로 인해 김천 지역은 더욱 주목받을 수 있었다.

[전설과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방짜유기]

조선 후기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까지 번성한 김천장은 주변에 특수한 수공업을 발전시켰으니, 그것이 바로 유기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각종 의례에 필요한 제기와 식생활을 위한 식기류가 대부분 유기였던 관계로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기에, 당시 유기는 상당한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따라서 설비와 원료 확보 등 초기 투자비용이 상당한 유기 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전국을 상대로 하는 광역화된 시장성이 우선 확보되어야 하는데, 김천이 가진 사통팔달의 교통 접근성이 필요충분조건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김천의 방짜유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김천징은 김천이 빗내농악의 발상지로서 일찍부터 풍물이 발달하고 널리 보급되었던 사정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세 좋다 안성유기, 소리 좋다 정주 납천방짜, 도듬질 좋다 김천방짜 떡맛 좋은 놋양푼에 장맛 좋다 놋탕기 살결 좋은 놋요강 분벽사창에 놋촛대요 칠첩반상기가 입맛대로,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 1960년대 이전의 유기 제품들이다. 집 안에서는 조반기, 대접, 주발, 탕기, 보시기, 종지, 바리, 발탄기, 쟁첩, 양품, 대야, 쟁반, 제기, 접시, 향로, 요강, 촛대,놋상, 수저, 놋비치, 함지, 밥통, 주전자, 적틀, 포틀, 모다기, 화로, 부삽, 타구 그리고 왕의 매화틀까지 놋쇠로 만들어졌다.”

위 인용문은 소설가 김주영이 1979년에 발표한 소설 『객주』의 한 대목으로 “도듬질 좋다 김천방짜”라는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듬질은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유기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을 말해 준다. 또 김천 민족 사학의 선구자인 최송설당(崔松雪堂)은 한글 가사 「금릉풍경(金陵風景)」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백두산일지맥이 동으로 뻗어나려/ 대소백산의 되얏으매 소백산 서북가지/ 속리산이 되얏난데 속리산 한줄기가/ 남으로 뻗어나가 금릉으로 배치하고/ 김천명당 여럿난데 산명수려 그 가운데/ 기암괴석 쌍립하니 그 형상이 이상하다./ 상대하야 섰난모양 사람으로 이르며는/ 신랑신부 마주서서 초례하난 거동같이/ 남동녀서 완연하고 각색제구 구비하다./ 용두방축 동자상(童子床)에 황신이 기르기요/ 감천수 주전자에 약수동 술잔이라/ 과하주천 술을 부어 교배하난 거동이며/ 하로노인 상객으로 마좌산 말을모니/ 시내거리 연석되어 내왕손님 모여든다./ 미곡에 쌓인 백미 금곡에 빛난 황금/ 봉황대상 봉황유(鳳凰遊)라 봉황같이 화락부부/ 고왕금래(古往今來) 유전(流轉)하니 천장지구(天長地久) 무궁일세/ 이따에서 나난자녀 님취여흔 하게면/ 군자숙녀 쌍을 이뤄 봉황우비(鳳凰于飛) 하오리다.”

송설당은 이 가사를 통해 김천 유기와 ‘사모바위’·‘할미바위’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감천수 주전자에 약수동 술잔이라”는 부분이 바로 약수동에서 생산되던 술잔, 즉 김천 유기를 은연중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천장의 발달 배경에는 모암산 사모바위양천동 할미바위의 혼인이라고 하는 김천의 풍수지리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김천장이 번성한 건 우연이 아니라 혼인형국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며, 혼인 축하객을 곧 장꾼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천 방짜유기는 이 고장의 전설과 문학을 통해서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김천징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김천의 유기는 놋쇠를 두들겨 펴서 만드는 방짜를 고집한다. 식기는 물론 요강·세숫대야·담뱃대는 물론이거니와 징·꽹과리와 같은 농악기도 생산했는데, 그중에서도 방짜징이 유명했다. 흔히들 경상도 지방의 징은 웅장하게 울면서 뒤끝이 황소울음처럼 치켜 올라가면서 여운 있게 멎는 것이 특징이고, 충청도 징은 말처럼 소리가 뒤로 흐르고, 전라도 징은 육중하면서도 땅으로 내려깔리는 것이 다르고, 강원도 징은 흥겹고 뒷소리가 출렁댄다고 하는데, 바로 황소울음 같은 여운이 길고 올라가는 듯한 김천징이 경상도 징의 소리를 대표한다.

이러한 황소울음을 머금은 징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천 번이 넘는 망치질이 필요하다고 한다. 징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리 1근에 주석 4냥 5돈의 비율로 혼합하고 도가니에 녹여서 쇳물을 만드는데, 지리산 물돌로 만든 틀에 쇳물을 부어 손바닥만 한 크기로 바디기를 만들어 도듬질을 한다. 바디기를 불에 달구어 대장장이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대정이 달궈진 바다기를 쇠판 위에 얹으면, 한 사람은 풀무를 돌리며 불을 보고 한잽이는 집게로 바디기를 집어 메어치도록 대어 준다. 이때 센메잽이, 전메잽이, 앞메잽이가 번갈아 바디기를 쳐서 징 크기 만하게 늘려 초바디기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초바디기 세 장을 합쳐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들겨 가장자리를 오그려서 징의 형태와 비슷한 속칭 이가리를 만든다.

이가리를 대정이 불에 달구고 집게로 잡고 돌리면서 쇠판 위에 망치질을 해 바닥을 얇고 반반하게 고르는 싸개질을 한다. 이때 바닥 두께는 가운데가 두껍고 중간은 얇고 가장자리는 보통으로 고르는 작업을 하는데, 고르기를 잘못 하면 징이 깨질 수가 있다. 싸개질이 끝나면 이가리를 또다시 불에 달구었다가 물에 담가 강도를 조절하는 담금질을 한다. 이 담금질이야말로 징소리의 생명을 좌우하는 제일 중요한 작업으로, 이 담금질에 김천징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

통상 담금질은 밤 11시에 시작한다. 이때라야 쇳물의 색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하며, 이튿날 6시가 되어야 담금질이 끝난다. 징의 기본 모양이 만들어지면 황새망치로 두들겨 울음잡기를 하는데, 첫 번째로 풋울음을 시험한 후 태문양을 돌려 새기고 구멍을 뚫어 손잡이 끈을 맨다. 끈을 매면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소리를 푸는 역할을 하는 주먹망치와 소리를 조이는 곤망치로 다시 두들겨 재울음을 잡는 울음잡기까지 마치고서야 비로소 김천징은 그 긴 여정을 마치고 황소울음을 길게 토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조상의 지혜로 태어난 방짜유기]

방짜유기는 조상의 얼과 지혜가 함께 녹아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한다. 최근 유기의 효용성이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유기로 만들어진 식기류들의 인기가 급상승 하고 있다. 혹자는 방짜유기를 생명의 그릇이라고도 부른다. 유기에는 해충을 쫓아내는 신비한 효능이 있으며, 미네랄을 생성하며 멸균 효과도 탁월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에 붙어 처치 곤란한 거머리를 놋수저로 물리쳤다고 한다. 십수 년 전에는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O-157균을 방짜유기 안에서 배양했더니 하루도 안 돼 모두 사멸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보온과 보냉 효과가 뛰어난 놋쇠 그릇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다. 그중에서도 수십 번의 열처리를 통해 두드려서 만든 방짜쇠는 아무리 높은 열을 가해도 인체에 유해한 성분 검출이 전혀 없는 무독의 무공해 금속이다. 일반 놋그릇은 소금이나 간장을 담으면 변질이 되지만 방짜유기는 수십 일이 지나도 여전하다고 하여 그 가치를 더 높게 보았다. 특히 비빔밥이나 냉면 그릇으로 사용하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그 온도를 유지하여 인기가 높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말 전쟁 물자를 충당할 요량으로 놋쇠라면 숟가락 하나까지 공출해 가면서 유기 산업은 쇠락해졌고, 해방 후 연탄을 쓰게 되면서 연탄가스에 민감한 놋그릇 대신 스텐제품들이 쏟아져 들어와 한동안 설자리를 잃었다.

2005년 부산에서 열렸던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때 세계 지도자들의 식사가 방짜유기에 담겨져 나왔고,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청와대의 만찬용 식기로 방짜유기가 사용되었다. 또 인기리에 방영되어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대장금」의 소품으로 쓰인 왕의 수랏상과 사대부가의 밥상에도 식기로 방짜유기가 등장해 우리 전통 유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기도 했다.

[장인의 손끝으로 6대를 이어 온 방짜]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김천 방짜유기 장인 김일웅[72세]은 김천 유기 역사의 산증인이다. 원래 김천 방짜유기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약물내기에 살다가 이웃한 하로마을 입구로 자리를 옮긴 김일웅의 유기 공방을 찾았다. 반갑게 내민 장인의 손은 거친 인생 역정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거북의 등딱지마냥 투박스럽기 짝이 없다.

김일웅은 1940년 지금의 김천시 황금동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유기 만드는 일을 배웠다. 김일웅의 외할아버지 김성노가 경상남도 함양에서 4대째 가업으로 징을 만들어 오다가 1910년대 초 김천으로 이주한 후 외숙부 김용비와 아버지 김학선이 가업을 이어 받았다. 소년 김일웅은 친형인 김두성, 외사촌형 김춘성과 함께 외할아버지와 외숙부, 아버지 밑에서 고된 유기 일을 배웠다.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셨어. 어려서부터 외조부의 영향을 받으셔서 유기에 대한 식견이 남다르셨는데 특히 내가 만든 징 소리를 들려 드리면 단박에 잘잘못을 짚어 주셨단 말이지.”

김일웅의 어머니 김우달은 어린 나이에 징 만드는 일을 배우는 아들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들을 위해 온갖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여장부로 알려져 있다. 김일웅은 자신이 만든 징에 어머니의 한과 자애로움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참 힘들었어. 젊을 때는 일 배운 걸 후회한 적도 있었고 욱한 마음에 치우고 싶은 맘을 안 먹은 것도 아니지만 우짜겠노. 내가 안 하면 김천 유기의 명맥이 끊어질 판인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묵묵히 외길을 걸어온 장인은 1977년 제7회 전국 관광 민예품 경진 대회를 시작으로 1978년과 1982년 3회에 걸쳐 큰 수상을 하면서 유기 장인으로서의 명성을 전국에 알렸다. 1980년에는 김천 문화 발전에 끼친 오랜 공적이 인정되어 김천시에서 가장 큰 상인 시민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86년 12월 11일 마침내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9호 김천징장으로 지정되어 명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전국유기보존회 회장을 맡아 전통 방짜유기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평생 고생만 시켰는데도 묵묵히 따라 준 집사람한테 늘 미안하면서도 고맙지. 이 일도 내 대에 끝나나 싶더니만 둘째 아들이 뒤를 잇겠다고 해서 그땐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속으론 고맙더라고. 이뿐 우리 며늘아이도 기특하기 짝이 없고 말이지.”

장인은 평생의 동반자이자 조언자로 곁을 지켜 준 부인 김정화[65세]와 하고 싶은 일 다 접고 19세 때부터 가업을 따라 준 둘째 아들 김형준[39세)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김일웅 장인의 방짜에 대한 깊은 집념과 애정, 가족들의 헌신이 김천 약물내기 방짜유기와 방짜징의 역사를 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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