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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 성씨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24
한자 世居姓氏
영어음역 Segeo Seongssi
영어의미역 Clan Residi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집필자 송영호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하여 살아오고 있는 성씨.

[개설]

성씨가 발생한 근원은 고대 중국의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족을 중심으로 다른 씨족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인 호칭이 성(姓)으로 나타난 것인데, 처음에는 왕실 내지 귀족, 고급 관료층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개국과 국가 변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나 귀화인(歸化人)에게 거주하는 지역 등의 명칭을 붙여 성씨를 하사하면서 급속히 확대되었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계기는 태조(太祖) 왕건(王建)[877~943]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개국 과정에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 따라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살던 지역 명에서 연유한 군호(君號)와 식읍(食邑)을 내리고 성씨를 하사한 사례가 많았다.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살면서 지역 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거 성씨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일반 서민까지 성씨가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로 과거의 영향으로 관료 제도가 보편화된 이후에라야 가능해졌다. 또 노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 말 노비 제도의 혁파와 1908년 호적법이 제정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변천]

1908년 호적법이 정비될 때의 성씨 관련 자료를 보면 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13%나 많았다. 조선 초에 4,296개에 달하던 본관별 성씨가 조선 중기에 1,000여개로 줄어들었다. 고려 시대에 유(柳), 최(崔), 김(金), 이(李) 씨의 순이던 성씨가 조선 시대에 이(李), 김(金), 박(朴), 심(沈) 씨 순으로 변하더니 현재는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씨 순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은 김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 시대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 말까지 전(全), 김(金), 백(白), 이(李) 씨 순으로 변동이 없다가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씨 순으로 대성(大姓)의 순서에 변화가 생겼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김산군(金山郡)에는 전(全), 김(金), 백(白), 이(李) 씨, 개령면에는 홍(洪), 임(林), 문(文), 전(田) 씨, 지례면에는 박(朴), 장(張), 강(康) 씨의 순으로 성씨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1832년 간행된 『김산읍지(金山邑誌)』에는 전(全), 김(金), 이(李), 백(白) 씨, 1871년의 『김산읍지』에는 전(全), 김(金), 백(白), 이(李) 씨 순으로 되어 있다. 1718년 여이명(呂以鳴)이 간행한 『금릉지(金陵誌)』에는 김산군 삼락동과 교동에는 박(朴) 씨와 백(白) 씨가 대부분이고 김천역이 있는 중동(中洞)[현재 남산동]에는 임(林) 씨가 대부분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 시대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 말까지 전(全), 김(金), 백(白), 이(李) 씨 순으로 변동이 없다가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씨의 순으로 대성(大姓)의 순서에 변화가 생겼다.

2008년 말 기준으로 김천의 성씨는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1만 8711명으로 가장 많고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1만 1340명,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4,924명, 김녕 김씨(金寧金氏)가 3,594명, 진주 강씨(晋州姜氏)가 3,462명,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3,240명,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2,594명의 순서로 나타났다.

[현황]

김천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토착 성씨는 김산 김씨(金山金氏)와 김산 전씨(金山全氏), 개령 임씨(開寧林氏), 지례 장씨(知禮張氏), 지례 박씨(知禮朴氏), 개령 홍씨(開寧洪氏) 등이나 지금은 거의 타처로 이주하고 지역에는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타지로부터 새로운 성씨가 대거 유입되는데 이들 성씨는 중앙에서 관료로 있다가 은퇴하거나 전란 시에 피난, 각종 정치적 사건에서 기인한 운둔, 귀향으로 의탁, 문중 인구의 증가에 따른 분가 등 다양한 사유로 비롯되었다.

조선 시대 김천 지역에 입향한 세거 성씨 중 2008년 말 기준으로 진주 강씨가 1,112가구 3,462명,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86가구 261명,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604가구 1,904명,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319가구 916명, 김녕 김씨가 1,169가구 3,594명, 김해 김씨가 6,153가구 18,711명, 선산 김씨(善山金氏)가 466가구 1,463명,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324가구 1,013명, 의성 김씨(義城金氏)가 421가구 1,416명, 해풍 김씨(海豊金氏)가 25가구 68명, 나주 라씨(羅州羅氏)가 154가구 500명,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659가구 1,968명,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101가구 300명 등이다.

또한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3,618가구 11,340명, 순천 박씨(順天朴氏)가 174가구 547명, 충주 박씨(忠州朴氏)가 112가구 368명, 성산 배씨(星山裵氏)가 228가구 699명, 수원 백씨(水原白氏)가 709가구 2,162명, 달성 서씨(達城徐氏)가 565가구 1,738명, 김해 송씨(金海宋氏)가 66가구 197명, 은진 송씨(恩津宋氏)가 387가구 1,169명,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450가구 1,371명, 영월 신씨(寧越辛氏)가 65가구 222명,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500가구 1,516명, 영월 엄씨(寧越嚴氏)가 131가구 461명, 성산 여씨(星山呂氏)가 130가구 421명,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351가구 1,117명, 장흥 위씨(長興魏氏)가 119가구 373명, 옥천 육씨(沃川陸氏)가 124가구 361명,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725가구 2,257명 등이다.

그리고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2,125가구 6,590명,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84가구 270명, 벽진 이씨(碧珍李氏)가 632가구 1,761명, 성산 이씨(星山李氏)가 611가구 1,802명,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663가구 1,991명, 연안 이씨(延安李氏)가 591가구 1,720명, 전의 이씨(全義李氏)가 83가구 253명, 전주 이씨가 1,515가구 4,924명, 합천 이씨(陜川李氏)가 179가구 520명, 평택 임씨(平澤林氏)가 481가구 1,524명,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673가구 2,140명, 성산 전씨(星山全氏)가 289가구 781명, 연안 전씨(延安田氏)가 119가구 358명, 죽산 전씨(竹山全氏)가 191가구 555명,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295가구 865명, 동래 정씨가 829가구 2,594명, 서산 정씨(瑞山鄭氏)가 164가구 468명, 영월 정씨(迎月鄭氏)가 5가구 16명, 창녕 조씨(昌寧曺氏)가 402가구 1,344명, 경주 최씨가 1,011가구 3,240명, 화순 최씨(和順崔氏)가 671가구 2,022명, 절강 편씨(浙江片氏)가 61가구 195명, 김해 허씨(金海許氏)가 171가구 495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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