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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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泰羲 |
영어음역 | Gwon Taehu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근구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종교인·정치가.
[개설]
광복 후 김천 지역에는 고덕환(高徳煥)을 중심으로 하는 고파(高派)와 심문(沈文)을 중심으로 하는 심파(沈派) 사이에 대립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두 파 간에 다툼이 있었는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고씨 파에서는 유교계 인사 김은배를 지원하고, 심씨 파에서는 기독교계 인사 권태희(權泰羲)를 내세워 권태희가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씨 파에서 정열모를, 심씨 파에서 권태희를 지원했으나 여당 측의 노골적인 탄압에 굴복하여 정열모는 입후보를 사퇴하여 제3자인 우문(禹文)이 당선되었다.
[활동 사항]
권태희는 1907년 4월 2일 경상북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중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었고, 일본 교토에 있는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신학과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했다. 광복 후 경성신학교 강사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 공립농림학교에 들어갔다. 1947년 김천공립중학교[현 김천중학교] 기성회장 심문의 주선으로 김천공립중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김천으로 이주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김천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국회 문교사회분과위원장으로 있었다.
6·25전쟁 때 북조선으로 갔다. 1951년 초 기독교 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 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이 되고, 그 해 8월 인민경제대학에서 수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