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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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𩡘 |
영어음역 | Yi Ha |
이칭/별칭 | 면여(勉餘),양계(陽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 16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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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651년 |
활동 | 1654년 |
활동 | 1660년 |
활동 | 1663년 |
활동 | 1675년 |
활동 | 1676년 |
활동 | 1680년 |
몰년 | 1688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금라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星山) |
대표 관직 | 사헌부장령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아버지는 병자호란 이후 절의를 지켜 개령 삼봉에서 두문불출한 숭정처사 이상규(李相規)[1596~1645]이다.
[활동 사항]
이하(李𩡘)는 지금의 김천시 감문면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 사헌부감찰에 오르자,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비, 효종의 어머니]의 복상을 기년복[1년 동안 입는 상복]으로 정한 것이 부당하다며 송시열 등과 맞섰으나 실패하였다. 1663년(현종 4) 고향 개령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독서를 일삼는 한편 『대동유현록(大東儒賢錄)』을 편찬하였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장령으로 부르자, 다시 출사하여 서인의 대공설[9개월 동안 상복을 입음]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관철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야 하였다.
1676년(숙종 2) 동래부사에 제수되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옥사에 연루되어 삼수로 귀양 가 7년을 지냈다. 그곳에서도 문을 잠그고 책을 벗 삼아 『소학(小學)』, 『예기(禮記)』, 『근사록(近思錄)』, 『이정전서(二程全書)』 등을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1686년(숙종 12) 유배지가 흥양으로 옮겨져 공의 깊은 학문은 저술로 남겨지지 못하였다. 1688년(숙종 14) 4월 8일 귀양지에서 영면하였다. 이하는 덕림서원을 창건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학문과 저술]
이하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배웠다. 4세에 이미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번득인다’라고 한문 구절을 엮을 만큼 명민하여, 아버지가 그를 기린아로 기대하는 바가 컸다고 한다. 학문하는 태도가 진지하여 깊은 곳까지 파헤쳤으며, 경사에 널리 통하였을 뿐 아니라 예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동유현록』을 편찬하였고, 문집 4권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감문면 금라리 뒤에 있으며, 후손 정헌공 이원조가 비명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이하가 수령으로 다녀간 곳에는 청백리로 추앙되어 송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