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C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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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민 |
김천시 부항면 사등리에 있는 부항면사무소 앞에서 승용차로 출발하여 해인리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윗두대’가 나온다. 한적한 이 마을을 지나서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오미자터널이 반갑게 손님들을 맞는다.
오미자터널을 통과하고 몇 번의 굽은 길을 지나면 검은색 기와지붕을 얹은 광산김씨 재실인 둔암재가 기품 있게 서 있다.
[광산김씨, 해인리에 들어오다]
해인리는 과거 광산김씨의 집성촌이었다. ‘광산’은 광주광역시 내의 광산구를 가리킨다. 『김천신문』에 따르면, 해인리의 자연 마을 해인동과 윗두대는 광산김씨 김성옥(金聲玉)이 임진왜란 때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피난을 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광산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따라서 해인동과 윗두대 중앙에는 입향조를 추모하는 재실인 둔암재와 쌍광재(雙光齋)가 높이 솟아 있다.
『김천신문』뿐 아니라 여러 문헌에는 광산김씨 김성옥이 임진왜란 때 마을에 입향했다고 전하지만,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해인리 이장을 지냈던 윗두대의 김정수[1937년생] 씨는 입향조가 병자호란을 피해 마을로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병자호란 때, 고때[그때] 우리 ‘성’(聲) 자, ‘옥’(玉) 자 할아버지, 요[여기] 바로 밑에 재실 있드제? 그 할아버지가 들어왔어…….”
[광산김씨, 백석을 일군 부자 집안이 되다]
1970년대 이전, 광산김씨들은 마을에 집성촌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으며, 그 중 백석을 일군 부자 집안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 아버지 형제가 4형제인데 그 당시 여서[여기서] 부자로 살았었는데, 그때 집에 방앗간이 있었고 그때 마을 반장도 하고, 그때 엽총이 있었다고. 그래가 우리 어릴 때 겨울 되면 사냥도 다니고. 그때 한 백석 했으니까 그 나름대로 부자라고 그랬지.”
하지만 광산김씨들이 해인리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확천금의 요행이 아닌,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노력하는 것밖에는 없더라고. 여기서 김천이 40㎞인데 박달나무 다듬이를 만들어 가지고, 지게 지고 김천에 가서 그걸 팔아 가지고 소금 사서 짊어지고 왔다고 그러더라고. 논을 칠 때 죽을 쒀서 먹어 가며 논을 쳤다 그러더라고. 우리 할아버지 때 그랬기 때문에 이걸 일궈 온 거야.”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광산김씨 집안은 백석을 일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리를 떠난 광산김씨, 묘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오다]
하지만 해인리의 백석 부자 집안 광산김씨도 도시화 바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부를 축적한 해인리의 광산김씨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갈망했고, 이에 대부분이 마을을 떠나 서울·대구·부산 등 도시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해인리는 집성촌으로서의 색깔이 엷어지며 각성촌 마을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2011년 현재 해인리에 거주하고 있는 광산김씨는 약 네 명 정도다.
해인리를 떠나긴 했지만 광산김씨들은 묘사를 지내기 위해 해마다 해인리를 찾고 있다.
광산김씨 재실인 둔암재에서는 음력 10월 10일 광산김씨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약 40~50명이 모였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10~15명 정도만이 참여하고 있다. 향사의 유사는 순번을 정한 후 돌아가면서 지내며, 초헌관·아헌관은 향사 당일 참여한 인원 중에서 무작위로 선출한다.
“누가 초헌관이니 아헌관이니 그런 거는 없어. 그냥 그날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뽑는 기야[선출하는 거야].”
향사의 유사를 맡게 되면 30만 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이 지원금을 이용하여 제수를 준비한다. 제물로는 돼지고기·건어물·삼실과·탕 등이 올라가며, 누가 유사를 맡느냐에 따라 음식의 양과 질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한다.
[정보제공]